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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28, 2026

공정위는 정답을 아는가 [이창훈의 경쟁법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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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시험장에서 커닝이 적발되면 처리는 간단하다. 해당 답안을 지우고 0점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채점 규정이 ‘커닝한 문제는 모두 1번을 찍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 채점한다’로 바뀐다면 어떨까. 뭔가 이상하다. 커닝을 하지 않았다면 그 수험생이 어떤 답을 썼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2번을 골랐을 수도 있고, 3번을 택했을 수도 있다. 부정행위는 지울 수 있지만, 그 자리에 어떤 답이 있었을지를 알아내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알 수 없는 답을 특정한 답으로 간주하는 순간, 채점은 측정이 아니라 창작이 된다.

20년 만에 꺼낸 가격 재결정 명령

최근 공정위가 바로 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른바 ‘가격 재결정 명령’ 이야기다. 담합으로 왜곡된 가격을 사업자가 독자적으로 다시 정하고, 일정 기간 그 내역을 당국에 보고하도록 하는 시정조치다. 2005년 도입됐지만 이듬해 밀가루 담합 사건에 한 차례 적용된 뒤 20년 가까이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이 명령이 다시 등장했다. 인쇄용지, 밀가루, 전분당 등 세 건의 담합 사건에서 잇따라 발동된 것이다. 말하자면 ‘커닝을 하지 않았다면 썼을 답’으로 답안지를 다시 작성하라는 주문이다. 다만 채점자가 답을 정하는 대신 수험생 스스로 답을 다시 쓰고, 당국이 그 답안을 들여다본다는 차이가 있다.

그 취지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과징금은 국고로 들어갈 뿐, 소비자가 더 지불한 돈을 돌려주지는 않는다. 담합을 제재하더라도 한 번 올라간 가격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무슨 소용이냐는 의문은 당연하다. 담합의 청구서가 결국 소비자의 장바구니에 꽂힌다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1990년대 세계 비타민 카르텔이 적발됐을 때에도, 2011년 유럽에서 세탁세제 가격 담합이 드러났을 때에도, 더 치른 값은 소비자와 거래처의 몫으로 남았다. 공정위가 20년 묵은 카드를 다시 꺼내 든 것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일 것이다.

정답지 없는 시장의 정상가격

그러나 시험과 시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험에는 적어도 정답지가 있지만, 시장에는 정답지가 없다. 가격 재결정 명령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담합이 없었다면 형성됐을 ‘정상가격’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그 가격을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엎질러진 물의 원래 모양을 알려면 물이 엎질러지지 않은 평행우주라도 있어야 할 판이다. 집값을 예로 들어보자. 4년 전 가격으로 아파트값을 ‘재결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어떨까. 그사이 금리가 몇 번이나 오르내렸고, 옆 동네에는 지하철역까지 생겼다. 4년 전의 가격은 장부에 남아 있어도 4년 전의 시장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

기업의 가격도 마찬가지다. 지난 몇 년 동안 원자재 가격이 뛰었고, 환율이 출렁였으며, 수요도 달라졌다. 그동안 오른 가격에서 담합으로 인한 인상분만 정확히 가려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계산 결과가 크게 엇갈리고, 법정에서는 그 숫자 하나를 놓고 수년씩 다투기도 한다. 가상의 상황을 놓고 추정 위에 추정을 얹어야 그나마 숫자가 나온다(우리는 이 추정을 ‘상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제도가 20년 가까이 서랍 속에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챗GPT]

[챗GPT]

법원도 일단 제동을 걸었다. 명령을 받은 사업자 일부가 효력정지를 신청했고, 지난 8월 말부터 서울고등법원이 이를 잇따라 받아들였다. 되돌리기 어려운 처분인 만큼 본안에서 적법성을 가린 뒤 집행하더라도 늦지 않다는 취지로 읽힌다. 공정위는 재항고를 제기하고 처분의 적법성을 입증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명령의 운명은 본안 소송에서 가려질 것이다. 다만 20년 만에 부활한 제도가 첫 무대에서부터 법원의 제동이 걸렸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공정위로서도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칼을 꺼내 든 셈이다.

가격은 시장이, 배상은 법원이

물론 국가가 가격을 직접 들여다보는 영역도 있다. 전기요금이나 버스요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경쟁이 애초에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법률에 정해진 산정기준과 심의절차에 따라 전담 기관이 가격을 규율하는 경우다. 경쟁법의 출발점은 다르다.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하도록 하되, 사업자들이 담합을 통해 그 과정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경쟁당국의 역할이다. 당국이 한 발 더 들어가 ‘적정한 가격’을 심사하기 시작하면 경쟁정책과 가격통제의 경계가 흐려진다. 특히 반기마다 가격변경 내역을 보고받는 구조는 자칫 사실상의 가격 승인제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기업들이 가격표를 바꿀 때마다 채점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다.

소비자의 주머니를 채우는 정공법은 따로 있다. 손해배상이다. 담합 때문에 더 지불한 금액을 법원을 통해 돌려받는 방식이다. 우리 법원도 담합 손해액 산정에 관한 경험을 꾸준히 축적해 왔고, 이제는 담합 제재 이후 손해배상 소송이 뒤따르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앞서 언급한 비타민 카르텔 역시 결국 각국 법정에서의 배상 소송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과징금과 형사처벌까지 더해지면 담합에 대한 억지력도 결코 가볍지 않다. 각자의 역할은 분명하다. 부정행위는 당국이 적발하고, 배상액은 법원이 정하며, 가격은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담합이 사라진 시장에서 어제의 공모자는 오늘의 경쟁자가 된다. 서로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경쟁하는 그 긴장 관계야말로 어떤 당국의 처분보다도 집요한 감시자가 될 수 있다.

시장이라는 시험에는 정답지가 없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은 틀릴 수 있고, 내일의 정답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경쟁이다. 따라서 정답지 없는 시험에서 채점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부정하게 작성한 답안을 지우는 것, 거기까지다. 지워진 빈칸에 무엇을 써넣을지는 수험생, 곧 시장의 몫이다. 공정위는 정답을 아는가. 모른다면 채점은 거기서 멈춰야 한다.

[이창훈의 경쟁법 인사이트]에서는 세종의 경영위원이자 공정거래그룹 팀장을 맡고 있는 이창훈 변호사가 경쟁법을 둘러싼 여러 법적 이슈들을 다룹니다. 국내외 중요 공정거래 사건들을 주도하면서 ‘상어(shark)’ 같은 집요함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한국경쟁법학회와 한국경쟁포럼 이사, 서울대 경쟁법센터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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