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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23, 2026

걱정을 품고 거제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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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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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절차는 신속했다. 먼저 반장님께 그만두겠다고 얘기하니 이유를 묻지 않으셨다. 질문은 딱 하나. 언제 나갈 생각이냐. 이번주까지만 하겠다고 말씀드리자 “알긋다. 고생했다”며 화기 감시 조끼를 주셨다. 나머지 며칠 동안 화재 감시도 할 겸 현장 돌면서 형님들한테 인사나 돌리라는 배려였다. 주황색 망사 조끼를 걸치자 그제야 여길 떠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어쩐지 볼일 다 못 보고 변소 나온 느낌도 들었다. 무슨 말을 덧대건 본질은 내가 못 버텨서 감행하는 도피. 후련할 리가 없었다. 문득 내년까지만 더 해볼까 싶었지만 퇴사 선언은 낙장불입. 아침 회의 시간에 이번주까지만 일한다고 선언하자 가장 격하게 반응한 이들은 필리핀 친구들이었다. 엉터리 영어로 “아임 엑시트(I’m exit)”라고 하니 곧장 알아듣고 서운해했다. “왜 나가 현우. 같이 해”, 반쯤 빈말이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했더니, 10년 넘는 제조업 경력 중 외국인 노동자들과 같은 공정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협업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 점점 피부색 다른 노동자와 일하는 일이 많아지겠구나. 새삼 바뀌는 시대의 정중앙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그날은 현장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막살’ 인사를 돌렸다. 다들 이해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헤어짐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판떼기였다. 대부분 고생했다, 잘 생각했다 정도 반응이었지만 개중에 특히 인상 깊은 대답이 있었다. 물량팀의 성함도 기억 안 나는 형님이었는데 신기하게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쉬는 시간에 가서 인사드리니 앞으로 뭐 할 거냐고 물으시더라. 아무래도 용접은 계속하겠지만 좀 덜 힘든 곳에서 일하고 싶다며 솔직하게 얘기했다. 형님은 조선소 하청 경력은 어딜 가나 먹어주니 이직이 쉬울 거라 하시더니, “현우야. 생각을 해봐라. 이 × 같은 데서 쥐×만 한 돈 받고 ×뺑이 친 놈한테 어느 회사가 ×까라고 하긋노?” 랩 가사처럼 자연스러운 말 흐름에 배 아플 정도로 웃었다.

퇴사 전날 금요일. 모든 장구를 반환하고 소장님께 인사드렸다. 조만간 술 한잔하자는 말이 돌아왔다. 빈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수요일에 연초면의 해물탕집에서 뵙기로 했다. 현장에서만 보았던 박 반장님도 오셨다. 주당으로 소문난 분이라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뉴 나오기 전 ‘쓰키다시’만으로 소주 한병을 비우고 시작하셨다. 사실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한창 조선소의 실상을 인터뷰로 떠들고 다닐 때 소장님이 정말 고생했다. 원청에서 얼마나 압력을 넣어댔을지 안 봐도 뻔했다. 저 때미 많이 고생하셨지예? 술 몇잔 꺾으며 여쭈니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니가 뭐 없는 말 지어냈나? 고생했고 마시라. 끝이었다. 모임을 만든 소장님보단 오히려 박 반장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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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님은 2026년 회사를 나갈 생각이었다. 말로는 정년퇴임이라곤 하지만 사실 정년이란 원청에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 하청에서 일하려고 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일을 더 이어나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일하고 싶진 않으신 듯했다. 몸이 못 버틴다고, 머리도 젊을 때처럼 빠르게 돌아가질 않아서 위험한 순간을 자주 겪는다고 했다. 바로 수긍했다. 20대 초반에 입직한 선배들은 40대 중후반쯤 되면 이미 종합병원이다. 실제로 정규직들의 경우 저 나이쯤 전환 배치를 신청하는 이가 속출한다고 한다. 신체검사하면 직업병이 줄줄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평균보다 훨씬 건강한 나조차 퇴근하면 앓는 일이 일상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술김에 물어보았다. 30년 가까이 쌓은 기술 후배들한테 못 물려주고 가시는 게 아쉽지 않으냐고. 반장님은 후우, 긴 날숨을 한번 내쉬더니, “아쉽지. 아쉬워. 정말로 아깝지. 뱃밥 먹는 거 이기 힘들지만 또 재밌거든. 맨날 무슨 일 터질까 조마조마하면서 새롭잖아. 함 맛 들이면 이마이 신나는 일도 없는데 우야긋노. 일 좀 물려주고 싶어도 다 나가 삔다. 젊은 아들이 싫다 카이 도리가 있나.”

좋은 노동이란 그저 내 삶을 개선하기 위해 싫은 시간을 버텨내는 과정이어선 안 된다. 책임감으로 보낸 시간만큼 일에 익숙해지고, 노동해온 기간만큼 사회를 유익하게 하며, 내 기술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 비로소 좋은 노동이라 할 수 있다. 단 한가지 조건이라도 빠지면 그저 싫은 일, 힘든 일이 될 뿐이다. 반장님이 일한 약 30년 동안 조선소엔 많은 일이 있었다. 반장님이 버텨온 세월 대부분 기간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으리라. 선배들한테 욕지거리는 물론 진짜로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고, 현장에선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던 시절. 그조차 제대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남은 가족을 길거리에 나앉게 했던 시절. 야근은 기본이요, 철야도 자주 해야 했던 과거가 마냥 ‘좋았던 옛날’일 리 없다. 하지만 분명 조선소 일이 ‘좋은 노동’이었던 때는 있었다. 조선업 세계 1위였던 일본을 제치고 정점에 우뚝 섰던 성공의 경험을 모두가 공유하던 시절. 힘든 만큼의 대가를 골고루 나눠 갖고, 현재보다 미래가 더 나으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던 나날들. 그 시간의 경험을 되살려 조선소 일을 다시 좋은 노동으로 만들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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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쓰고 있는 2026년 10월. 조선소 나온 지 1년, 크레인 위로 올라간 노동자 소식을 들었다. 유최안 부지회장의 파업 후 4년 만에 하청 노동자가 또다시 극한투쟁을 벌인다.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과거엔 보이지 않던 문구가 눈에 밟혔다. 거제 시장도, 원청 사장도, 중앙 언론도 모두 한입으로 ‘파업이 장기화하지 않도록’이란 전제를 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다. 식당에 손님들이 가게 밖까지 줄지어 웨이팅 중인데 주방장이 손 놓으면 장사가 되겠나. 하지만 주방장 대우가 엉망이며, 젊은 사람들은 식당 일을 배우려 하지 않고, 고용주마저 처우 개선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이 가게는 오래갈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가게 하나가 망하면 주변 지역도 다 초토화된다. 무슨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거제 자취방 짐을 싸면서 다음 할 일을 계속 고민했다. 아무래도 조선소 하청업체 일년간의 경험을 한번 털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현우 | 창원시에서 여러 회사 전전하며 10년간 제조업 노동자로 일했다. 서울 성수동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 등에서 2년 반 일하다 다시 경남으로 돌아왔다. 최근까지 거제 조선소에서 일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위원을 했다. 산문집 ‘쇳밥일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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