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 갈치 한 마리, 여섯 가지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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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 사진]
가을 바다가 깊어지면 은빛 갈치가 살을 찌운다. 갈치는 여름에 알을 낳으려 얕은 바다로 몰려들고, 늦여름부터 찬 바람이 부는 가을까지 살이 도톰하게 오른다. 기다란 몸이 칼을 닮아 갈치 또는 칼치라 불렀고, 한자로는 도어(刀魚)라 적었다. 일본에서도 '큰 칼 물고기'라는 뜻의 다치우오(太刀魚)라 부른다.
갈치는 생김새도 습성도 별나다. 비늘이 없고, 몸을 덮은 은빛 가루는 구아닌이라는 성분이다. 이 가루는 인조 진주에 광택을 내는 원료로 쓰였다. 헤엄칠 때는 머리를 위로 하고 몸을 곧추세운다. 갈치 낚시꾼들이 미끼를 세워서 다는 것도 이 습성 때문이다.
◇ 칼을 닮은 생선, 소금에 절여 서울로
갈치는 옛 기록 속에서도 오래 헤엄쳐 왔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도어를 경기도와 충청도의 산물로 적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산지를 충청·강원·경상·전라도까지 넓혀 기록했다. 정약전은 흑산도 바다의 생물을 정리한 '자산어보'에 치마끈처럼 가늘고 길다는 뜻의 군대어(裙帶魚)라는 이름을 올리고, 속명을 갈치어(葛峙魚)라 했다.
조선 후기 서유구의 '난호어목지'에는 갈치를 소금에 절여 말린 뒤 서울로 보냈고, 맛이 좋으면서 값도 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바다에서 먼 한양 사람들도 소금 갈치로 바다 맛을 봤다.
갈치는 한 마리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살은 굽거나 조렸고, 내장은 소금에 버무려 젓갈을 담갔다. 바람에 말린 갈치는 다음 계절까지 밥상을 지켰다. 버릴 것을 줄이고 오래 먹을 방법을 찾는 일, 그것이 우리 밥상의 살림 솜씨였다.
은갈치와 먹갈치라는 이름도 여기서 갈린다. 제주에서 낚싯줄에 바늘을 여러 개 달아 한 마리씩 올리는 채낚기 갈치는 은빛이 그대로 살아 있어 은갈치라 부른다. 목포를 비롯한 서남해에서 그물로 잡은 갈치는 배 위로 올라오는 동안 서로 부딪히고 그물에 쓸려 은빛이 벗겨지면서 거무스름해진다. 이것이 먹갈치다. 같은 갈치를 두고 잡는 방식이 이름을 가른 셈이다.
◇ 귀해진 국민생선, 몸에 맞게 먹는 법
값싸고 흔하던 갈치는 이제 귀한 생선이 됐다. 우리 연근해 갈치 어획량은 1974년 16만6천391t으로 정점을 찍었고, 1970∼1980년대에는 해마다 10만t 넘게 잡혔다. 지난해 생산량은 4만4천480t으로 정점의 4분의 1 수준이다. 산란 한번 못 해본 어린 갈치를 많이 잡은 데다, 바다 수온이 오르면서 어장까지 흔들렸다. 고수온이 덮친 2024년에는 갈치 생산량이 한 해 전보다 26.6% 줄었다. 그 빈자리를 수입 갈치가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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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 제공]
그래도 갈치를 대하는 우리 마음은 그대로다. 무를 깔고 자작하게 조린 갈치조림, 굵은소금만 뿌려 구운 갈치구이, 청둥호박과 배추를 넣어 맑게 끓인 제주 갈칫국. 갈치 한 토막을 앞에 두면 어머니가 차려주던 저녁 밥상이 함께 떠오른다.
한의학에서는 갈치를 맛이 달고 성질이 평하거나 약간 따뜻한 음식으로 보고, 주로 비위(脾胃)에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비위를 돕고 기혈을 보충하는 음식으로 썼다. 동물성 식품을 '혈육유정'(血肉有情)의 음식이라 하여 몸이 허할 때 기운을 채우는 재료로 여긴 전통도 있다.
약선은 효능과 함께 주의할 점도 말한다.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거나 피부가 예민한 사람은 조심해야 하고, 통풍이 있거나 요산 수치가 높은 사람은 먹는 양을 조절하는 편이 좋다. 좋은 음식도 내 몸에 맞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양생의 기본이다.
현대영양학으로 보면 갈치는 100g에 단백질이 17g 안팎 들어 있는 고단백 생선이다. DHA와 EPA 같은 오메가-3 지방산, 비타민과 무기질도 함께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조리법이다. 짠 젓갈이나 진한 조림 양념을 곁들이면 나트륨 섭취가 금세 늘어난다. 갈치 먹는 날에는 양념을 덜고 무, 배추, 호박 같은 채소를 넉넉히 곁들이는 것이 좋다.
제주 갈칫국이 이 원칙을 잘 보여준다. 싱싱한 갈치의 감칠맛에 청둥호박의 단맛, 배추의 시원함이 어우러져 강한 양념 없이도 맛이 선다. 재료끼리 서로의 맛을 살려주는 음식이다.
◇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갈치 요리
갈치를 보면 손자병법 '허실편'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손자는 "군대의 형세는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친다"(兵之形 避實而擊虛)고 했다. 이어 "물은 땅의 생김을 따라 흐름을 정하고, 군대는 적의 형세를 따라 승리를 만든다"(水因地而制流 兵因敵而制勝)고 했고, "군대에는 정해진 형세가 없고 물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兵無常勢 水無常形)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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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 사진]
갈치가 꼭 그렇다. 싱싱할 때는 회가 되고, 불을 만나면 구이가 되고, 무를 만나면 조림이 되고, 국물을 만나면 국이 된다. 바람과 시간을 견디면 건어물이 되고, 소금과 만나 삭으면 젓갈이 된다. 회는 생선 본래의 맛을 살리고, 구이는 불의 힘으로 담백함을 끌어낸다. 조림에서는 갈치가 양념을 품고 무가 갈치 맛을 머금는다. 모습은 여섯 번 바뀌어도 갈치의 맛은 이어진다.
손자가 말한 허(虛)는 비어 있는 자리이고, 새것이 들어설 자리이기도 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그릇을 쓸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갈치 건어물은 수분을 덜어내 오래 견디는 몸을 얻었고, 젓갈은 소금과 시간이 빈자리를 채워 깊은 맛을 냈다. 덜어낸 자리에서 새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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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 사진]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젊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 필요한 음식의 양과 조리법이 같을 수 없다. 계절이 바뀌면 밥상이 바뀌고, 몸 상태가 달라지면 먹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약선은 이 변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칼로 자르듯 나누지 않고, 계절과 체질, 조리법에 맞춰 음식을 조화시키는 데 무게를 둔다.
저속노화 밥상도 멀리 있지 않다. 제철 생선을 알맞게 먹고, 채소를 곁들이고, 소금과 기름을 줄이고, 천천히 먹는 데서 시작한다. 특별한 건강식품 하나에 기대는 것보다 평범한 밥상을 오래 건강하게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갈치는 칼을 닮았지만, 우리 밥상에서 칼이 된 적은 없다. 가족의 저녁을 채우고, 바다와 계절을 잇고, 어머니의 손맛을 전해 왔다. 때에 따라 모습을 바꾸되 제맛을 잃지 않는 것, 좋은 것은 나누고 지나친 것은 덜어내는 것. 은빛 갈치 한 마리가 가을 밥상에 올려놓는 지혜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0월13일 09시04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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