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테라 영상 데이터 날리고 식음 전폐하다 여행책 1위까지 만든 사람 [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오래 해 온 일의 장점은 익숙함입니다. 그 익숙함을 바탕으로 능숙함까지 이어지면 금상첨화겠죠. 여행을 떠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 번 다녀 온 곳이나 지금 사는 곳 또는 좋아하는 곳과 인연이 있다면 어색하지 않게 잘 즐길 수 있죠.
하지만 태어나 처음 가는 곳이나 정보마저 별로 없을 정도라면 긴장감이 올라갑니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실수를 연발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서툰 걸음과 도전 하나 하나가 모여 결국 제자리를 찾아갈 겁니다.
이정기가 쓴 책 ‘우리는 목적지를 묻지 않기로 했다’는 여행서 출판사 대표가 직원들과 유럽 소도시를 걸으며 살아남은 도시마다 숨어 있는 생존과 버팀의 이유를 경영의 언어로 읽어냅니다.
저자는 완벽한 준비 대신 일단 떠나는 용기가 삶의 다음 장을 연다는 응원을 보냅니다. 또한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이 곧 일과 삶을 다시 세우는 시간이라고도 전합니다.
우리는 목적지를 묻지 않기로 했다
이정기 ㅣ 타블라라사
‘여행 에세이의 탈을 쓴, 가장 지독하고 아름다운 경영 에세이’. 여행책만 10년째 내고 있는 출판사의 대표가 자신이 낸 책에 대한 한 줄 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발점 자체가 시련이었다. 2년간 모은 10테라바이트(TB) 분량의 영상 데이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고, 저자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그런 밑바닥에서 저자는 출판사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출판의 ‘출’ 자도 모르던 사람이 모두가 디지털 지도를 볼 때 아날로그 종이 여행 지도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무모해 보였지만 미친 듯한 디테일과 집념이 10년을 이끌었다. 결국 ‘에이든 국내여행 가이드북’을 여행 도서 1위에 올리는 업적도 뒤따랐다.
그런 그가 10년이 지나 먼 길을 떠난 이유는 책의 한 문장에 담겨 있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여행은 일상의 익숙함을 밀어내고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를 더 또렷하게 보여 준다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저자 이정기는 책 ‘우리는 목적지를 묻지 않기로 했다’라는 제목처럼 목적지를 묻지 않고, 발길 닿는 소도시를 하나씩 이어 갔다. 여행서 출판사 사람들의 유럽 소도시 여행기인 이 책은 저자가 직원들과 묵직한 배낭을 메고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체코의 도시를 걸으며 엮은 이야기다.
여정은 독일 아헨과 몽샤우에서 시작한다. 아헨의 경계선에서 저자는 불안을 동력으로 삼는 법을, 고립된 몽샤우에서는 결핍이 만들어 낸 생존의 힘을 읽어 낸다. 유럽의 수도 브뤼셀에서는 아르누보 건축이 다르게 살아남기 위한 혁신의 방식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에서는 제방을 무너뜨리며 쟁취한 협상의 기술과 척박한 땅을 개척한 ‘어포던스 엔진’의 원리가 이어진다. 로테르담의 현대식 건물은 끝이 아니라 새잎이 돋는 ‘마디’처럼 보였다고 저자는 적었다.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들어서면 걸음이 한결 느려진다. 주인이 일곱 번이나 바뀐 릴, 하루쯤 온전한 휴식을 건네는 시골 마을 생브낭을 지나 아미앵에 닿는다. 고딕 성당의 정수라 불리며 파리 노트르담보다 두 배 가까이 크다는 대성당이 있는데도 도시는 뽐내지 않는다. 날 좀 봐 달라고 애걸하지 않는 차분함 앞에서 저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묻는다. 상리스에서는 작더라도 실제로 내딛는 첫걸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파리는 약속의 장소가 돼 돌아온다.
책의 무게중심은 독일로 옮겨 간다. 생애 첫 아우토반을 달려 검은숲으로 향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제국 도시들을 차례로 만난다. 프라이부르크에서는 뻐꾸기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울름 시민들은 죽어도 간섭이 싫다며 버텼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배경으로 알려진 뇌르틀링겐, 아이들의 간절한 기도로 도시를 지켜 냈다는 딩켈스뷜, 술 한 잔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로텐부르크의 마이스터트룽크 이야기까지. 살아남은 도시마다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뷔르츠부르크에서는 파괴 뒤의 재기를, 밤베르크에서는 땅을 주지 않으면 강 위에 짓겠다던 고집을 만난다. 모두가 바꿀 때 바꾸지 않겠다며 지켜 온 훈제맥주 한 잔은 이 책이 말하는 버티는 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뉘른베르크에서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시계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조립하는 일을 생각하고, 마지막 도시 체코 프라하에서는 보헤미아 독립왕국의 흔적을 따라 걷다 새로운 시작을 맞는다.
이 책이 낭만적인 유럽 소도시를 걷다가도 자꾸 생존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의 시선은 풍경 너머의 사정을 향한다. 책 속에는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가득하다. 작고 잦은 성공에는 작고 잦은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자주 실패하고 있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작은 사업을 꾸리는 이들뿐 아니라 흔들리는 모든 이의 어깨를 두드린다. 불안은 방향을 가진 힘이라는 문장도 오래 맴돈다.
여행 사이사이에는 회사 이야기가 불쑥 끼어든다. 4년 차부터는 수익률이 좋은 정부 사업과 외주를 하지 않기로 했고, 그 이유를 딱 세 가지로 꼽는다. 오래 버티게 한 힘은 ‘사라지지 않는 쉬운 일’을 찾는 데 있었다는 고백도 흥미롭다.
출판사이면서 출판업을 모른다는 자조 섞인 선언은 오히려 이 회사가 가진 가장 큰 무기처럼 읽힌다. 완성되지 않은 기반은 언제든 소실될 수 있지만 작은 돌 하나가 피라미드가 될지 콜로세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문장에는 쌓아 온 사람의 체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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