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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3, 2026

할머니께 한글을 가르쳐드릴걸…한글날의 후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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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광주 장흥의 한 한글교실에서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는 “세계를 읽는 것이 언제나 말을 읽는 것에 앞서며, 말을 읽는 것은 끊임없이 세계를 읽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남광주 장흥의 한 한글교실에서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는 “세계를 읽는 것이 언제나 말을 읽는 것에 앞서며, 말을 읽는 것은 끊임없이 세계를 읽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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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평생 직장을 다니셨기에 나는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자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외할머니는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아본 적이 없었고, 평생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폭력만 행사하던 외할아버지를 남편으로 둔 탓에 외할머니는 머리에 생선 바구니를 이고 다니며 팔남매를 키웠고, 그 자녀들이 낳은 손주 다섯명까지 길러냈다. 나도 그 손주 중 한명이었다.

무려 열세명의 자손을 길러내면서 장사와 살림을 도맡았던 ‘슈퍼우먼’이었지만, 외할머니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늘 순박함과 어리숙함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도시 빈민이었던 외가는 유명한 달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좀도둑도 사기꾼도 많았지만, 가장 흔했던 것은 급한 사정을 대며 돈을 빌린 뒤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이었다. 동네 공터에는 신나는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은 뒤, 두통부터 중풍까지 고친다는 만병통치약을 비롯해 온갖 정체불명의 물건을 팔던 약장수도 자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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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돈을 떼이고 불량이거나 가짜인 물건도 곧잘 샀다.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구들장 아래 꼬깃꼬깃 감춰둔 쌈짓돈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곤 했다. 이모들과 삼촌들은 할머니에게 화도 내고 당부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그날도 무언가를 사와 삼촌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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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렇게 몸에 좋다더라.”

내가 봐도 조악해 보이는 엉터리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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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거 다 뻥이에요!”

내가 소리치자 삼촌이 외할머니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초등학생도 알아보는 걸 왜 엄마는 아직도 멍청하게 다 속아서 이런 걸 사요!”

나 때문에 할머니가 더 혼쭐이 나는 것 같아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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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상함과 미심쩍음을 느끼고 위선과 과장을 감지하고 거짓과 가짜를 눈치채는 감각이 생긴 건 언제였을까.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평생 그런 감각, 그런 분별력을 갖지 못했다.

할머니의 어리숙함을 이해하게 된 것은 장애인 부모를 둔 작가의 책을 읽고 나서였다. 청각장애인 부모 아래에서 청인으로 자란 작가가 장애와 비장애 세계의 경계인으로 살아온 경험을 풀어놓은 그 책에서 나는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보다 오히려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더 크게 느꼈다.

작가의 부모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그래서 한 문장을 끝까지 정확하게 쓰기 어려웠고, 긴 단어를 잘 외우지 못했다. 전세와 월세, 보증금 같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사기도 많이 당했다.

이 책을 읽고서야 나는 외할머니가 어리숙했던 것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처음 이해하게 됐다. 늘 하찮고 시시하게 여겨왔던 한국의 주입식 공교육이, 어쨌든 장기간의 집단생활 속에서 인간관계의 작동 방식과 생리를 배우게 하고 분별력과 눈치, 사회성 같은 것들을 길러줬음을 인정하게 됐다.

특히 ‘문맹’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교육할 중요한 도구가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무대에 오른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70~80대에 이르러서야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이름과 금액을 적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었던 시절 은행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할머니, 손주가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망 다닌 할머니, 아들이 학교 숙제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 괜히 혼을 낸 할머니 등 한글을 몰라서 서러웠던 삶들이 절절하게 펼쳐진다. 이 작품에서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운 뒤 얻은 것은 단순한 문자 해독력이 아니었다. 자신감과 자존감, 자기가치감이었다.

서울 은평구에서 살림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을 운영하는 활동가들이 펴낸 ‘나이 들고 싶은 동네’에도 한글을 배우면서 삶이 변화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 심부전, 뇌경색, 퇴행성 무릎 관절염을 앓던 할머니는 체중이 87㎏에 달해 체중을 줄이지 않고서는 혈당과 혈압을 조절하기도, 무릎 통증을 완화하기도 요원했다. 의료진은 운동을 권했지만 할머니는 시큰둥했다. 할머니에게 운동을 설득하던 의료진은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돼 한글교실을 연결해줬다.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며 친구와 자신감을 얻게 되고 자연스럽게 바깥 활동도 늘어났다. 그 결과 체중이 15㎏ 줄었고 혈당도 안정됐으며 그제야 자신의 건강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배움은 삶을 위로하고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세계적인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는 문해를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쓰는 기술로 보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읽는 것이 언제나 말을 읽는 것에 앞서며, 말을 읽는 것은 끊임없이 세계를 읽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말년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글을 몰랐기에 필담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 열세명의 자손을 길러내고도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세계에서 고립돼 외롭게 살다 가셨다.

초등학교 시절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외할머니에게 “그건 뻥이에요!”라고 외치는 대신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드리고 싶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었던 가장 큰 보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후회로 남았다. 한글날이 다가오면 그 후회가 더욱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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