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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11, 2026

납작보리를 맨 6살, 이를 뒤쫓는 12살 누나의 추격전 [금자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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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5일, 서울을 등지고 남쪽으로 뻗친 1·4후퇴 피난민 대열. 연합뉴스
1951년 1월 5일, 서울을 등지고 남쪽으로 뻗친 1·4후퇴 피난민 대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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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6살 난 호완이는 살아있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전날 다녀갔다고 했다.

12살의 소녀 가장 금자는 허망하고 막막했다. 2살 호기를 업은 채로 8살 호각의 손을 잡고 일주일 넘게 천안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일주일 동안 되돌아온 길이었다. 호각이도 이가 들끓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안양역에서 잃어버린 동생 호완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북상했다. 오는 도중 두꺼운 털옷을 입고 남하하는 중국군 병사들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당시 남하한 중국군이 30개 사단 30만명이었다.* 그들은 금자에게 “왜 올라가냐. 내려가라”며 천진하게 장난을 쳤다. 한강에는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부표가 띄워져 있었다. 피난 갈 때는 꽁꽁 언 한강 위를 걸어갔다. 이번에는 출렁거리는 부표 위를 조심스레 건너왔다. 여전히 한강은 얼어있었지만 걷기에는 위험하다고 했다. 폭격의 여파인지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메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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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금자를 비롯한 4남매가 보육원으로 떠나기 전 군인들이 군홧발로 들어와 사무실로 쓰던 집이었다. 옷장 속의 옷과 선풍기·라디오 등의 가전제품도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 들어와 싹쓸이해간 모양이었다. 2층에 올라간 금자는 불발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박격포탄이라고 했다. 온실 천장 유리를 박살 내고 들어온 포탄은 나무 바닥을 쑤시고 들어간 것처럼 꽂혀 있었다. 시멘트 바닥이었다면 폭발하면서 집이 풍비박산이 났을 터였다.

1·4후퇴에도 서울을 떠나지 않은 이웃집 양산가게 여주인이 전날 호완과 마주친 일을 소상하게 설명해줬다. 호완은 “누나랑 형을 찾으러 남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집을 뒤져 죽을 쑤어먹던 납작보리를 찾아내 베개 모양으로 길게 늘어뜨려놓고 자신에게 멜빵처럼 메게 해달라고 했단다. 동생 중에 가장 총명하다는 칭찬을 받던 아이였다. 나름 휴대식량을 단단히 준비해 먼 길을 떠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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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이상을 거리에서 보냈던지라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하루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동생의 뒤를 밟아야 했다. 한 시간여 집을 살피고 양산가게 주인과 대화를 나누다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것이 명동과는 마지막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의 추억이 깃든 그곳에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하루도 머물지 않고 집을 나오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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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찾으러 가야죠. 어떻게든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루도 안 쉬고 어떻게. 고작 12살이.”

“그때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나는 여사님과의 첫 인터뷰에서 “피난을 갔다가 중간에서 동생을 찾기 위해 돌아오고, 다시 동생을 따라 내려갔다”는 말에 기함했다. ‘금자의 기이한 모험’이라는 제목의 대서사극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것은 한반도 전역을 무대로 인간, 아니 어린이의 한계를 초월하는 장대하고 불가사의한 모험담처럼 느껴졌다. 납작보리를 멜빵처럼 메고 떠난 동생, 막내를 업고 이를 뒤쫓는 누나의 이야기는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했다. 첫 피난길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와 곤경은 다시 같은 길에서 반복될지 몰랐다. 그래도 겁이 없었다. 첫 피난길에서는 무엇을 경험했던가. 여사님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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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가다 보면 행렬 속에서 리더가 하나씩 생겨요. 폭격할 때 어떻게 숨어야 하는지 요령도 알려주고요. 저녁 때는 ‘오늘은 이 마을에서 쉽시다’하고 이끌어서 다 한집에 몰려가서 자요. 우리는 어른이 없으니까 방 제일 구석으로 갔어요. 다들 앉아서 자다가 정찰기 소리라도 나면 다 튀어나가지요. 우리는 가장 나가기 힘든 구석에 있었지만, 폭격 났을 때 누구보다 재빨리 피했어요.

한번은 욕심을 부리던 피난민 가족이 크게 화를 당한 적이 있어요. 평택의 어느 농가 부뚜막 가마솥에 피난민들이 줄을 서서 밥을 했어요. 한 집씩 순서대로 불을 피우고 밥을 해서 퍼가는데 우리 차례가 되었지요. 장작은 귀하고 짚으로 불을 땠어요. 어떤 아주머니가 방 안에 있는 사람에게 ‘딸이 임산부인데 동상에 걸렸으니 잠깐만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거예요. 방 안 사람들은 ‘꽉 차서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보기엔 자기네 식구뿐인 듯했어요. 한데 문고리를 붙들고 그 아주머니가 사정하니까 못 들어오게 철사로 문고리를 감은 거예요. 그동안에 우리 밥은 다 됐고 ‘빨리 푸라’는 뒷사람 성화에 막 푸고 있는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서 불길이 솟았어요.

저는 본능적으로 밥을 들고 8살짜리 손목을 잡은 채 평택 평야를 한참을 뛰었어요. 2살 호기를 등에 업은 채로요. 한참을 앞만 보고 뛰다 뒤돌아보니 그곳 밤하늘이 뻘겠어요. 그날 부뚜막에 쉼 없이 불을 땠으니 아궁이와 연결된 방 구들장이 엄청 달구어졌다가 마침내 폭발한 거였어요. 우리는 논 가운데 쌓아놓은 짚단에 기대어 한참 숨 고르기를 한 다음 그 추운 들판에서 밥을 먹었지요. 마음을 저렇게 쓰면 벌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길에서는 죽은 사람을 여럿 봤지요. 엄마가 폭격에 맞아 눈밭에 피 흘려 누워있고, 그 옆에서 어린아이가 우는 광경은 참…. 사람들은 그냥 혀를 끌끌 차고 지나갔어요. 또 있어요. 한번은 산길에서 개울을 건너는데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이였어요. 어떤 사람이 지게를 가져와 한 명씩 태워 건너게 해주면서 10원인가를 받았어요. 저는 돈 대신 무궁화표 빨랫비누를 주겠다고 했어요. 집에 있던 빨랫비누를 가져왔는데, 그땐 그게 귀했어요. 지게꾼한테 ‘빨랫비누 하나 드릴 테니 8살 동생 한번, 나는 2살 동생 업은 채로 한번 실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건너는데 가장자리에 건장한 남자가 죽어있고 부근이 시뻘겋게 얼어있었어요. 아무도 본체를 안 하고 가더라고요.

코고무신 한짝과 실내화 한짝씩을 신고 그 먼 길을 갔어요. 혜명보육원으로 옮긴 뒤 신발을 잃어버렸으니까요. 고무신이 커서 새끼줄로 발과 함께 묶었는데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런데 평택 서정리 쯤에서 어느 집 마당에 운동화가 널려 있는 거예요. 신어보니 딱 맞아요. 옛날에 엄마가 빨간 가죽구두를 맞추어준 적 있는데, 피난길의 그 신발이 가죽구두보다 더 반가웠어요. 생전 처음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요. 피난길의 가장 큰 행운이었어요.

사람 목숨만큼 질긴 게 없어요. 다 살아지더라고요. 오산 근처였나, 부대 식당에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먹다 버린 소시지 통조림들이었어요. 꽝꽝 얼어있으니 상할 염려는 없다며 어른들이 먹으니 저희도 따라 먹었죠. 또 굶고 있으면 ‘어찌 너희들끼리만 가냐. 와서 같이 먹자’는 분도 있었고, 어떤 할머니는 자기들 먹으려고 아껴놓은 고구마를 멀리서 보고 쫓아와서 주고 갔어요. 본인들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하늘이 무너져도 이렇게 솟아날 구멍이 생기더군요.”

두 번째 내려갈 때는 비슷한 어려움을 또 겪지는 않았다. 인파로 가득 찼던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중공군이 쫓아온다며 급하게 서두르던 그 길이 아니었다. 긴장감이 줄었다. 잠은 처음처럼 마을에 들어가 빈집에서 잤다. 다만 배는 더 곯았다. 피난 행렬이 없으니, 도움 줄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8살 호각에게 민가에 가서 밥 좀 얻어오라 시켰다. 호각은 자존심이 밥보다 더 중요한 아이였다. 차라리 굶겠다고 했다. 그건 금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쫄쫄 굶었다. 등에 업힌 호기도 배가 고플 텐데, 울지도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일주일 만에 거짓말처럼 호완이를 만났다. 호완이는 미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 모습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6·25전쟁사8-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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