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허무는 트럼프…‘견제와 균형’도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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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수도’로 불리는 미국 워싱턴 한복판을 걷다 보면 고대 로마의 신전과 광장을 떠올리게 된다. 백악관과 의사당, 대법원 등 권력 핵심부 건물의 양식은 대부분 로마풍이다. 건국 주역 중 한명인 토머스 제퍼슨이 의사당과 백악관을 지을 때 로마를 모델로 삼은 결과다. 의사당이 위치한 ‘캐피틀힐’이라는 이름도 로마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따왔다. 주권재민과 자유라는 건국 세대가 추구한 정치적 이상을 드러내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남긴 유산에는 공화정의 이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서 공화정이 무너져간 역사도 있다.
제47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해 1월20일 의사당 로턴다 홀에서 헌법 준수를 엄숙히 선서했다. 그러나 그는 그 헌법 정신을 거스르며 공화국을 사실상 1인 지배 체제로 몰아가고 있다. 유럽 전제정의 폐해를 겪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건국 세대는 바로 이런 사태를 막고자 견제와 균형을 공화국 유지의 핵심 장치로 설계했다. 권력이 한 인물에게 쏠리면 그의 야망과 탐욕만으로도 공화정이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건국 주역 중 한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헌법 제정 과정에서 ‘제왕적 대통령’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대담하고 폭력적인 자들, 거친 욕망과 지칠 줄 모르는 사리사욕으로 움직이는 자들”의 자리다툼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그런 자들 눈앞에 명예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이익의 자리인 관직을 내보이면 그들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온 세상을 뒤흔들 것”이라고 말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으로부터 꼭 250년이 된 올해, 민주주의 250년의 역사가 희대의 선동가 한 사람 앞에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트럼프
기원전 49년,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직할지와 경계에 있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속주 총독이 군대를 이끌고 직할지에 들어서는 것은 금지돼 있었으니, 로마를 향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한 뒤 종신 독재관에 올라 공화정의 숨통을 끊었고, 로마는 제정으로 넘어갔다. 카이사르는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했는데, 트럼프 2기를 맞은 미국이 바로 그 순간에 있다. 트럼프는 행정부 권한을 남용하고, 사법부 독립을 흔들고, 선거 결과에 불복하려 하며, 언론·대학·시민사회의 반대 목소리를 공격한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수호자여야 할 의회마저 무력하다.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글 한 줄에 연방하원 의장 후보가 낙마하고, 현역 상·하원 의원들이 경선에서 탈락하는 광경을 본 뒤 의원들은 숨을 죽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백악관 고위 참모들은 자신들이 ‘철권통치’로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농담을 주고받고, 트럼프의 측근 스티브 배넌은 의회를 러시아의 형식적 의회인 두마에 비유했다고 전했다. 공화정의 기본 원리가 안에서부터 허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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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직 안보·정보 당국자들의 모임인 ‘더 스테디 스테이트’(The Steady State)는 이 문제에 정보분석의 방식을 적용했다. 400여명의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국무부 등 출신 인사가 참여한 단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 “미국은 전통적 독재체제로의 직접 전환이라기보다 민주주의 후퇴의 명확한 징후를 보이며, 실제로 더욱 전제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평생 외국 정세를 분석해온 이들이 자국 정치를 공식 평가한 것은 처음이다. 이들은 행정 조치, 사법부 판결, 의회 활동, 선거 관리, 언론·시민사회 여건 등 관찰 가능한 지표를 근거로 삼았다.
보고서가 ‘높은 확신’ 등급을 부여한 판단은 세가지다. 첫째, 행정부 권력의 공고화와 견제·균형의 침해, 공무원 보호 및 감찰 장치의 의도적 약화로 민주주의 후퇴가 가속되고 있다. 둘째, 행정부가 정적으로 지목한 인물을 처벌하고 측근과 우호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법무부와 정보기관을 적극적으로 무기화하고 있다. 셋째, 근거 없는 부정선거 음모론과 언론에 대한 공격, 비판 세력의 정당성을 박탈하려는 시도가 반복되면서 민주적 제도에 대한 공적 신뢰가 하락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것이 대중 일부에서 권위주의적 국정 운영을 용인하는 태도를 키울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 단체는 미국이 선거와 법원 등 민주적 제도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행정부의 통제권을 굳히기 위해 시스템을 조직적으로 조작하는 체제, 즉 ‘경쟁적 권위주의’의 경로에 진입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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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더 나아가 파시즘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조너선 라우치 선임연구원은 지난 1월 ‘디 애틀랜틱’에 기고한 ‘그렇다, 파시즘이다’라는 글에서 트럼프의 통치가 정부를 개인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수준을 넘어 이념과 실행 방식에서 파시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제한 권력의 주장, 사법체계의 정치화, 폭력의 과시, 이민자의 비인간화, 선거 공정성에 대한 공격, 백인·기독교 민족주의, 지도자 숭배 등이 결합하는 양상이다. 그는 트럼프 1기 때는 대외 팽창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아 파시즘이라는 규정을 유보했지만, 영토적 야심과 군사적 위협, 국제법에 대한 경멸이 겹친 2기에서는 파시즘이 횡행했던 1930년대의 그림자를 본다고 했다. 다만 그는 법원과 주 정부, 언론의 독립성이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트럼프의 시도가 미국 전체를 파시즘 국가로 만드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할 것으로 봤다.
트럼프 패권 유지 ‘철의 법칙’은?
더 큰 문제는 세계를 무대로 한 트럼프의 야망과 탐욕에 대해서도 그 누구도 견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는 올해 1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로벌 권한에 어떤 제한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가지가 있다. 나 자신의 도덕성, 나 자신의 마음이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국제법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스스로를 ‘언덕 위의 빛나는’ 나라로 부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자임했던 미국이, 이제는 억압과 극우적 독재주의의 전파자로 돌아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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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개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트럼프는 올해 1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해 미국 감옥에 수감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국가 안보의 핵심인 무역과 영토, 자원을 보호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이 세계 패권을 결정해온 ‘철의 법칙’이며,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유지할 것이다.” 그는 지난달 28일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 베네수엘라의 매장량 5분의 1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1월의 발언이 수사가 아니라 본심이었음을 보여준다. 뉴욕타임스는 다음날 ‘새로운 형태의 미국 식민주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자원 통제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반발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같은 신문이 92년 전 내건 제목과 비교하면 역사의 역설이 선명해진다. 이 신문은 1934년 6월10일 ‘우리의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명백한 운명’이라는 옛 교리가 다른 나라를 대등하게 대하는 새 정책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전했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선린 정책’을 내세워 중남미에 대한 무력 개입에서 거리를 두려 했다. 미국은 1933년 다른 나라의 내정과 이권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고, 이듬해에는 쿠바에 대한 개입권을 보장하던 조약을 폐기했다. 신문은 미국이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푸에르토리코·필리핀·괌·쿠바·파나마운하·도미니카공화국·아이티 등으로 세력을 넓혔다고 적었다. 그러나 획득한 영토는 자산이 아니라 짐이 되었고, 그 뒤 경제적 침투 방식으로 바꿨으나 이것조차도 해당 국가의 경제를 파탄내거나 미국의 상품 시장으로 전락시켰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우리는 이제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전혀 다른 역사와 유산을 가진 이웃 민족에게 우리의 정치·경제·사회 제도를 위에서 주입하거나 강요하려는 시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한 세기 전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
결국 미국 시민의 손에
지금 미국은 파시스트적 지도자와 자유주의 세력 간 정면충돌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1차 대결은 오는 11월 중간선거, 결정적 승부는 2028년 대선이 될 것이다. 그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허다.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면 탄핵 절차에 돌입할 것이 분명한 만큼, 트럼프는 중간선거에서 패배해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선거 효력을 법정으로 끌고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언덕 위의 빛나는 나라로 남을지, 쇠락하는 제국의 운명을 밟을지는 결국 미국 시민들의 손에 달렸다. 250년 전 제퍼슨이 로마의 기둥에 새기려 했던 것도 황제의 권위가 아니라 시민의 주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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