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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1, 2026

5만명이 뒤엉켜 살던 범죄 소굴에…누구도 못 건드린 공간 있었다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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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촬영된 구룡성채 모습. 현재는 철거돼 공원으로 바뀌었다. 증축과 날림 공사로 무한히 팽창했던 구룡성채에서 중앙부 빈 공간이 유독 눈에 띈다. 청나라 관청인 ‘아문(衙門)’이 위치했던 장소다. 중국이 소유한 상징적인 땅이어서 그곳만큼은 증축을 피해갔다. [Ian Lambot·Wikimedia Commons]

1989년 촬영된 구룡성채 모습. 현재는 철거돼 공원으로 바뀌었다. 증축과 날림 공사로 무한히 팽창했던 구룡성채에서 중앙부 빈 공간이 유독 눈에 띈다. 청나라 관청인 ‘아문(衙門)’이 위치했던 장소다. 중국이 소유한 상징적인 땅이어서 그곳만큼은 증축을 피해갔다. [Ian Lambot·Wikimedia Commons]

홍콩의 ‘구룡성채(구룡채성)’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한때 5만명이 살던 범죄의 온상이자 ‘마굴(魔窟)’로도 불렸던 무시무시한 공간. 지금은 철거돼 공원으로 바뀌었으나 한때 이곳은 세계 3대 범죄조직 삼합회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위 사진을 자세히 보자. 중앙부의 우측을 보면 빈 공간이 눈에 띈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빈틈이라곤 없는 구룡성채에도 끝내 ‘삼켜지지 않은’ 공간이 남아 있던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무법천지의 대명사이자 홍콩 영화 전성기를 일으킨 근원지, 지금은 소멸해 기억 저편으로 흘러갔음에도 여전히 이름 네 글자 앞에서 묘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구룡성채에 대한 독특한 책이 출간됐다. 신간 ‘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이다. 한국 학자인 저자가 오직 ‘어떻게 국가 안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곳이 존재할 수 있는가’란 질문 하나를 붙잡고, 이제는 사라진 구룡성채를 답사하며 써내려간 르포르타주다. 사라진 공간에 대한 애잔함이 느껴지는 신간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구룡성채를 이해하려면 역사의 기막힌 사연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변곡점은 1898년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홍콩경계확장조약’이다. 영국은 홍콩섬과 구룡반도 남부를 할양받은 상태였는데, 이 조약에는 예외조건이 하나 있었다. 구룡성채만큼은 ‘중국의 관할권 행사’를 허용한 것. 이게 무법지대 탄생의 씨앗이 된다.

시간이 흘러 1945년, 일본 패망으로 홍콩은 격랑에 휩싸였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홍콩 반환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해군 파병과 홍콩 식민정부를 통해 이곳을 재장악했다. 중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이자 ‘대등한 승전국’이었으므로 불평등조약 폐기를 요구할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깨지고 내전이 격화하자 상황이 복잡해진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내몰고 승리한 것이다.

이후 6·25전쟁으로 중국이 전쟁에 뛰어든다. 중국으로서는 전선을 두 개로 쪼개기가 곤란했다. 중국은 자국 영토로 인정된 구룡성채를 마지노선으로 삼고, 영국이 이 땅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선에서 홍콩 문제를 봉합했다. 홍콩 식민정부 역시 구룡성채 철거 시도로 본토를 자극하는 건 부담이었다. 이에 구룡성채는 진공상태이자 누구도 손을 못 대는, 꽉 차 있지만 텅 빈 공간이 된다.

처음부터 구룡성채가 빼곡한 건물의 덩어리였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1950년대 인근 빈민촌에서 큰 화재가 연달아 발생하고,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수천수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하면서 구룡성채도 집결지가 된다. 어차피 치외법권 지역이니 채광, 일조, 소방 등의 건축법은 무시됐다. 사람들은 비용을 투자해 건물을 지어 팔거나 세를 놓기 시작했다. 땅이 부족해지자 나중엔 아예 ‘ㄷ자’ 모양의 건물 사이에 벽을 덧붙이거나, 두 건물 사이의 앞뒤에 벽만 붙여서 날림 공사를 감행한다. 직사각형 공간이 꽉 차자 사람들은 다시 위로 향했고 ‘증축 위의 증축’이 일상이 됐다.

범죄자들이 모여들면서 범죄의 삼박자라 할 ‘도박, 매춘, 마약’이 구룡성채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홍콩 식민정부가 치안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진짜로 홍콩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 전체를 봉쇄하면 중국 본토를 자극할 수 있었다. 살인자를 잡아들여 본토로 추방해도 다시 돌아와 구룡성채에 숨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홍콩 경찰은 구룡성채 치안을 직접 관리하는 대신, 구룡성채를 장악한 삼합회와 손을 잡았다. 삼합회 입장에서도 그게 나았다. 도박, 매춘, 마약이 번성하려면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야 하는데, 구룡성채 내 질서가 엉망이 돼 통제를 벗어나면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길 지경이었다. 강력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홍콩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게 나았다.

그런 복잡성 속에서도 구룡성채 중앙의 건물만은 소용돌이에서 비껴갔다. 이곳은 청나라 관청인 ‘아문(衙門)’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아원, 양로원, 학교 그리고 마약 중독자 진료 시설로 사용됐다. 중국이 소유한 상징적인 땅이어서 그곳만큼은 증축을 피해갔다. 구룡성채 내에서 유일하게 하늘을 볼 수 있는 건물이었다.

홍콩 영화 산업도 삼합회와 관련이 깊었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오자 경극 배우들은 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표현이 가능한 무술영화에 참여했다. 성룡과 홍금보도 경극 배우 출신이다. 홍콩영화가 부상하면서 삼합회는 영화에 투자하거나 아예 영화사를 차렸고, 배우들 관리를 독점했다.

특히 1980년대 등장한 ‘홍콩 누아르’는 홍콩 반환의 두려움에 기반했다. 홍콩 반환 시점이 코앞에 다가오자 설마설마하던 분위기는 1984년 중·영공동선언으로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1989년 천안문 사태는 홍콩인들에게 ‘10년 뒤 자신들의 미래’로 여겨졌다. 반환 후의 두려움이 영화의 색깔을 짙은 어둠으로 물들였다. 홍콩 누아르의 탄생이었다.

왕가위 감독, 양조위 주연의 ‘아비정전’ 일화가 책에 자세하다. 구룡성채는 영화인들을 매료시켰지만, 영화를 찍으려면 삼합회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했다. 삼합회는 사실 구룡성채 배경의 액션영화를 기대했지만 왕가위 감독은 지독하리만치 느린 템포의 영화를 만들었고, 흥행이 부진해지자 삼합회를 피해 피신하기도 했다. ‘걸작 탄생’ 이면의 아이러니인 셈.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삶’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로 213m, 세로 126m’ 직사각형 모양의 땅에 무려 5만명이 살았고, 일반인 수는 삼합회 조직원 수를 압도했다. 인구밀도를 환산하면 서울에 인구 10억명이 사는 것과 같다. 주민자치회인 ‘카이퐁’이 구룡성채에도 등장했고, 이들은 치안 불안을 이유로 범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구룡성채 카이퐁이 조직됐던 첫 번째 이유가 ‘화장실 시체 처리’ 때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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