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도감] 공룡보다 오래 산 은행나무가 ‘민원’을 만났을 때
‘야생의 ○○가 나타났다!’
숲이 아닌 도시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동식물을 마주칩니다. 어떤 생명은 도시로 밀려들고, 어떤 생명은 하루아침에 베이고 뽑혀 나갑니다. [이웃도감]은 도시에서 인간과 어색하게 공존하는 동식물을 기록합니다.
지난해 가을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다. 오경민 기자
가을이 오면 경향신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정동길은 노란색으로 물듭니다. 길을 따라 줄지어 선 은행나무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대표적인 가로수입니다. 대기 오염, 병해충, 화재에 강하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잎이 보기 좋아 많이 심었습니다. 서울시 가로수 3그루 중 1그루는 은행나무입니다. 서울시 통계를 보면 전체 가로수 28만8877그루 중 10만97그루(34.7%)가 은행나무입니다. 플라타너스로 알려진 양버즘나무(4만4749그루), 느티나무(3만9664그루)보다 2~3배 많습니다.
흔하디흔한 은행나무가 멸종위기종?
한국의 도시에서는 흔하디 흔하지만 은행나무는 사실 멸종위기입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은 은행나무를 ‘위기’ 등급으로 분류합니다. 번식이 까다로워 인간의 도움 없이 살아남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년 이상 자란 나무만 열매를 맺는 데다, 열매가 크고 무거워 스스로 멀리 퍼지기 어렵습니다. 씨앗 껍질은 냄새나고 독성이 있어서 동물이 먹어서 퍼뜨려 주지도 않습니다. 전 세계에서 야생 은행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은 중국 저장성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야생 은행나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절기상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는 의미의 ‘소설’을 엿새 앞둔 지난해 11월16일 서울 노원구 화랑대 철도공원에서 시민들이 가을의 끝자락을 만끽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은행나무는 가까운 친척도 없습니다. 모든 생물은 ‘계-문-강-목-과-속-종’으로 분류됩니다. 예를 들어 개는 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식육목-개과-개속-회색늑대종으로, 인간과 같은 ‘척삭동물문-포유강’에 속합니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식물계-은행나무문-은행나무강-은행나무목-은행나무과-은행나무속-은행나무종으로 분류되고, ‘은행나무문’에 속하는 종은 은행나무가 유일합니다. 은행나무문의 다른 나무가 모두 멸종하고, 은행나무 한 종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의 조상은 공룡이 살던 시대보다도 오래전 지구에 등장했습니다. 은행나무는 약 2억년 동안 형태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립니다. 1억년 전 화석에서도 지금의 은행잎과 흡사한 부채꼴 모양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잎이 넓적한데도 활엽수로 분류되지 않는 점도 특이합니다. 활엽수 잎맥은 굵은 잎맥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잎맥이 복잡하게 연결된 그물 형태를 띠지만, 은행나무 잎맥은 잎자루에서 잎끝을 향해 계속 갈라지면서 나란히 뻗어있습니다. 편의상 ‘침엽수’에 포함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침엽수와 계통이 달라 침엽수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냄새나고 불편해서…시작된 ‘암그루 제거’ 사업
지난해 9월18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역로 은행나무에 은행열매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열매수집망이 설치되어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누군가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일부러 찾아 나서지만, 누군가에게 은행나무는 골칫거리입니다. 가을이면 지방자치단체에는 은행나무 열매와 관련한 민원이 쏟아집니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이 사람 발이나 차량에 밟혀 터지면서 특유의 악취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지자체는 각종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진동수확기로 미리 열매를 털어내기도 하고, 수집망을 설치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종자가 열리는 암그루를 수그루나 다른 나무로 교체하는 사업도 활발합니다. 과거에는 어린 은행나무의 암수를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이 DNA를 이용해 암수를 판별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암그루를 골라 교체하는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서울환경연합에 따르면 올해 서울시 자치구들은 790그루에 가까운 은행나무 암그루를 교체할 계획입니다. 용산구는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로’를 위해 254그루의 암그루를 수그루로 교체하기로 했고, 광진구도 ‘은행 열매로 인한 민원사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암그루를 수그루로 바꿔 심을 방침을 세웠습니다. 전국 곳곳에서도 은행나무 암그루를 다른 나무로 교체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해민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아무리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도시의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품는 가치는 단기간의 불편함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장기적인 관점으로 가로수를 가꿔나가야 하는 행정이 목소리 큰 사람 몇 명의 민원에 흔들리면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1000년을 사는 나무…‘독살 사건’에 휘말리다
천연기념물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원주시 제공
은행나무는 오래 삽니다. 도시처럼 생육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도 100년 안팎을 살고, 자연 상태나 사찰 등에서는 1000년 이상 살아남기도 합니다. 오래된 은행나무에서도 노화의 뚜렷한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국내 곳곳에도 오랜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경기 양평군 용문사 은행나무와 강원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는 나이가 150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보호수로 지정된 ‘방학동 은행나무’도 600세 가까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수형으로 유명한 강원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는 800~1000년을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명이 길고 자태가 웅장하다 보니 은행나무를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여긴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고사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담장 옆에는 수령 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미술관 측은 지난 4월 조경업체를 고용해 나무 밑동에 전동드릴로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주입했습니다. 이후 푸르러야 할 5월부터 잎이 누렇게 변해 떨어지는 등 나무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서울환경연합과 부암동 주민들이 지난 5월26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앞에서 은행나무 독살 주범 환기미술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미술관 측의 사과와 책임 있는 복원을 요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주민과 환경단체 등이 사과와 나무 복원을 요구하자 미술관은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미술관은 “은행나무와 관련해 부암동과 환기미술관을 아끼는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깊이 사과드린다”며 “은행나무의 회복과 포괄적인 관련 상황 개선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필요한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술관이 은행나무를 없애려 한 배경에도 ‘민원’이 있었습니다. 미술관 측은 해당 나무가 고압전신주에 가까이 있고, 나무뿌리가 도로 위로 튀어나와 통행할 때 위험하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민원을 받아왔다고 말했습니다.
2억년 넘게 살아남아 도시의 공해를 견뎌온 은행나무도 빗발치는 민원 속에서는 살아남기 쉽지 않습니다. 크고 웅장하게 자란다는 이유로 사랑받아온 나무가, 이제는 너무 크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이유로 제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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