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의 가면 벗고 난 뒤에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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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 | 문화비평가
“우리는 코스프레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지난 세기의 끝에 내가 만화 동호회를 만들며 공지한 말이다. 여기는 성인들이 모여 진지한 비평과 창작을 할 뿐, 어린애들처럼 분장하고 장난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매년 핼러윈이면 우리는 미친 듯한 분장 파티를 벌였다.
둘리, 보노보노, 슬램덩크 감독님 등 만화 주인공 분장은 당연했다. 일본 유학생은 거대 버섯 분장을 사서 공항에서 달려왔고, 나는 두달 동안 수염을 기른 뒤 왼쪽만 자르고 아수라 백작 흉내를 냈다. 염라대왕으로 꾸미고 마장동에서 가져온 생간을 나눠준 친구도 있었다. 핼러윈 파티나 코스프레가 처음 들어올 때는 외국에서 가져온 해괴망측한 놀이라며 비판하는 말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도 혜화로터리까지 짧은 행진을 하며 욕을 먹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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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세대가 지났다. 이제 우리는 핼러윈에 모이지 않지만, 아마도 상당수는 학부형이 되어 아이들에게 자신의 오랜 솜씨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핼러윈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홍대 앞이나 강남에서 마법사나 공주님 분장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고등학생들이 졸업 앨범을 찍을 때도 그 해 유행하는 밈을 흉내 내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분장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앞에서 유명인들이 벌이는 멧갈라를 능가한다는 칭찬을 받고 있다.
격세지감이란 말로도 부족해 보인다. 점잖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런 분장 놀이의 파티장이 된 것일까? 봉산탈춤이나 하회탈 같은 전통이 없지는 않지만, 온갖 귀신들의 가면 축제가 넘쳐나는 일본과 비교하면 역시나 얌전한 편이었다.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던 내게 이런 경험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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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십대 때 회사의 창립기념 파티를 앞두고 이런 공문을 받았다. ‘미스 ○○ 선발대회, 부서마다 남직원 1명씩 참가해 주세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여자처럼 생겨 여자처럼 논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남중, 남고, 남초 대학, 군대를 지나며 그런 놀림에 진저리를 쳐왔던 터였다. 도대체 왜 이런 걸 하는 거지? 여직원이 80%가 넘는 여초 회사였다. 잡지팀에 남자 평직원은 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평소 외근만 하던 광고영업팀의 40~60대 남성들 전원이 자진 참가했다. 직원도 아닌 사진 스튜디오의 실장님도 나왔다. 여직원들은 신이 나서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동원해 그들을 꾸며 줬고, 출연자들은 꾀꼬리 목소리로 교태를 쥐어짰다. 솔직히 싫었다. 보는 것조차 싫었다. 성적 고정관념과 그걸 뒤바꾸는 문화에 대한 공부도 부족했던 때라 그냥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쾌감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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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부정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모두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업사원들의 처세라 생각했다. 이런 일에 뒤로 빠지지 않고 망가져야 사장의 눈에 들 수 있다든지. 그런데 아니었다. 분장하고 연기하는 남자들도, 그걸 꾸며주고 놀리는 여자들도, 어떤 광기에 휩싸여 눈물이 빠지도록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원래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신하고픈 욕망이 있다. 하룻밤 초능력 영웅으로 변신해 마음껏 뽐내고 싶다. 좀비나 악당처럼 무섭고 부정적인 존재로 바뀌어 남을 놀래주고 싶다. 오랫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청년은 인형 탈을 쓰자 거리를 돌아다닐 용기를 얻는다. 위선적인 정치인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그를 놀리기도 한다. 너무나 ‘고퀄’이 넘쳐나자, 일본에서는 ‘수수한(地味) 핼러윈’이라며 힘을 빼기도 한다. ‘과자인 줄 알고 개 사료를 산 외국인’ ‘쓰레기 안 버린 남편 때문에 짜증 난 아내’ 등을 저렴한 생활 소품으로 꾸민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가면을 벗고 분장을 지운 사람들은 터벅터벅 일터와 학교로 가야 합니다. 나는 그들이 썼던 가면을 상상해본다. 광란의 흔적을 치우는 환경미화원은 어젯밤엔 마법의 빗자루를 든 마녀가 아니었을까? 어깨 굽은 취준생은 거대한 곰 인형이 되어 모두의 갈채를 받았던 건 아닐까? 근엄한 성직자인 저 남자가 섹시한 원피스로 모두를 매혹하진 않았을까? ‘도움이 안 되는 외국인’이라는 눈총이 두려운 저 사람이 어젯밤만큼은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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