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왜 업고 나와?”…파리 패션쇼 뒤집은 기괴한 런웨이의 의미
마티에르 페칼
사람을 등에 업은 모델, 옷에 공기를 불어 넣어 몸집을 부풀린 의상, 옷인지 조형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패션… 올가을 파리 패션위크에서는 ‘예쁜 옷’을 보여주는 패션쇼와는 거리가 먼 장면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옷의 형태와 소재뿐 아니라 신체 자체를 낯설게 보이게 만드는 실험이 두드러진 것이다. CNN은 4일(현지시간) 이번 시즌 파리 패션위크에 기존의 패션 미학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다양한 시도가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캐나다 패션 브랜드 마티에르 페칼이었다. 지난달 28일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열린 2027 봄·여름 컬렉션에서 모델들은 몸을 휘감은 옷과 찢긴 데님, 시위대를 연상시키는 스타일링으로 런웨이를 채웠다. 쇼의 마지막에는 한 모델이 금빛 광택의 드레스를 입고 정장을 차려입은 백인 남성을 본뜬 인형 두 개를 등에 업은 채 등장했다.
그렇다면 왜 남성 두 명을 등에 업었을까. AP통신은 이 장면을 ‘부유한 엘리트’를 등에 진 모습으로 설명했다. 이번 컬렉션의 제목은 ‘The 99%’였다. 앞선 시즌 ‘The 1%’에서 세계 최상위 부유층의 특권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풍자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99%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특히 사회 다수를 차지하는 99% 사람들을 패션쇼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소수에게 집중된 특권과 그 밖의 다수라는 구도를 비틀어 보여줬다. 외신들은 쇼의 마지막에 모델들이 부유한 엘리트를 연상시키는 인형을 등에 업은 퍼포먼스가 이번 컬렉션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마티에르 페칼이 패션을 통해 사회의 1%와 99%라는 현실을 비틀었다면, 다른 브랜드들은 옷과 몸에 대한 기존 관념을 흔들었다. 이번 시즌 런웨이 곳곳에서는 현실에서는 쉽게 입기 어려운 옷과 신체를 과장하거나 뒤틀어 보이게 만드는 디자인이 잇따라 등장했다.
릭 오웬스
미국 출신 디자이너 릭 오언스는 패션을 통해 인간의 몸을 낯선 형태로 바꿔놓았다. 산업용 운송 끈을 재활용해 만든 단단한 드레스부터 몸을 감싸는 튤과 탄성 소재로 만든 구조물까지 등장했다. 오언스는 ‘섬세한 잠옷’이라고 표현했지만 보그는 이를 두고 인간의 옷이라기보다 외계 생명체를 연상시킨다고 묘사했다. 이처럼 낯선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옷을 선보인 데는 이유가 있다. 오언스는 컬렉션 제목을 ‘돌’로 잡고 자신과 다른 존재를 악마화하고 배척하는, 이른바 ‘돌을 던지는 행위’를 비판했다. 옷을 통해 인간의 몸을 낯선 존재처럼 빚어내며 ‘다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 것이다.
꼼데가르송. AFP연합뉴스
꼼데가르송은 ‘왕실의 삶과 일상의 삶이 하나가 될 때’를 주제로 내세웠다. 모델들은 왕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머리 장식을 썼지만, 몸에는 데님과 코듀로이처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의 옷을 걸쳤다. 반대로 평범한 소재의 옷은 몸을 부풀리고 뒤트는 형태로 만들어져 거대한 조형물처럼 보였다. 미국 패션 매체 WWD는 꼼데가르송의 패션이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위계와 서로 다른 가치관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해석했다.
꼼데가르송. AFP연합뉴스
이세이 미야케는 아예 바람을 옷의 재료로 끌어들였다. 쇼는 거대한 천을 공기로 부풀리고 꺼뜨리는 공연으로 시작했다. 이어 공기를 가두는 돛처럼 만들어진 나일론 재킷과 스커트가 등장했다. 옷이 몸을 감싸는 데 그치지 않고 주변의 공기까지 디자인 일부로 끌어들인 것이다. 옷이 고정된 형태의 물건이 아니라 움직임과 공기, 공간에 따라 변하는 존재로 확장했다.
이세이 미야케
발렌시아가는 누구나 입는 평범한 옷에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드는 고급 맞춤복의 기술을 끌어들였다. 흰 셔츠와 티셔츠에 촘촘한 스티치를 넣어 허리를 조이고 볼륨을 만들며 평범한 옷의 재단과 봉제에 공을 들인 것이다. 뉴욕타임스(NYT) 패션평론가 버네사 프리드먼은 발렌시아가의 이번 컬렉션을 두고 “일상적인 옷차림은 한층 고급스럽게 끌어올리고, 격식 있는 옷은 편안하게 풀어냈다”며 “재택근무 이후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옷차림을 포착했다”고 평했다.
디올 패션쇼. AFP연합뉴스
디올은 옷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식으로 변화를 보여줬다. 지난달 29일 파리 튀일리 정원에서 열린 쇼에서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은 시폰과 오간자 등 가벼운 소재를 활용해 기존의 단단한 실루엣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마침 이날 파리는 9월 말인데도 무더위가 이어져 쇼장에 선풍기와 차광막까지 설치됐다. 보그는 실제 무더위 속에서 선보인 이 가벼운 옷을 두고 “지구가 더워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옷도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쇼. AFP연합뉴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아예 옷을 덜어냈다. 속옷이나 수영복처럼 보이는 옷 위에 얇은 옷을 걸치거나 아예 몸을 많이 드러낸 차림이 등장했다. 커다란 나뭇잎 모자와 과장된 장식도 런웨이에 올랐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드레아스 크론탈러는 파리의 무더운 여름을 겪으며 “옷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더위를 피해 셔츠형 잠옷 한 장으로 지냈던 경험에서 이번 컬렉션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 단순히 노출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기온이 올라가는 시대에 몸을 덜 덥게 하면서도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옷의 가능성을 실험했다고 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AFP연합뉴스
이번 파리 패션위크의 ‘이상한 옷’들은 단순히 입기 어려운 옷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입을 수 있느냐를 묻기 전에, 먼저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택에는 럭셔리 업계의 절박한 이유가 숨어 있다.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는 2022년 이후 지금까지 약 6000만명이 럭셔리 소비를 떠난 것으로 추산했다. 최근 2년 사이 가격은 약 20% 올랐고, 소비자들은 비싼 가격을 지불할 이유를 더욱 까다롭게 따지고 있다. AP통신은 “최근 럭셔리 업계가 단순히 더 좋은 소재와 정교한 제작만으로 소비자를 설득하기 어려워졌다”면서 “사람들에게 ‘저게 뭐지?’라고 묻게 만드는 새로운 경험과 이야기가 필요해졌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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