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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3, 2026

“케어 플랜 없음” 선언 이후 시작되는 ‘말기 케어’ 바로 보기 [건강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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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l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

의료인류학자, 말기 돌봄 2년간 관찰
말기는 ‘호스피스 상담 시작’하는 전환점
미술치료 등 통한 ‘고마움’ 표현 등으로
관계 회복 경험하는 ‘좋은 죽음’ 도와

종양이나 합병증을 해결하기 위한 수술·항암제 등 동원 가능한 치료 옵션이 모두 소진되면 의사는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통증 조절, 호스피스 연계, 장례 논의, 의미요법과 미술치료 등 말기 돌봄의 다양한 실천들이 비로소 펼쳐진다. 챗GPT 그림
종양이나 합병증을 해결하기 위한 수술·항암제 등 동원 가능한 치료 옵션이 모두 소진되면 의사는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통증 조절, 호스피스 연계, 장례 논의, 의미요법과 미술치료 등 말기 돌봄의 다양한 실천들이 비로소 펼쳐진다. 챗GPT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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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

의료인류학자인 강지연 저자의 신간 제목이다. 병원에서 이 선언은 의사가 더는 사용할 수 있는 항암제와 수술, 시술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릴 때 사용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선언을 단순한 ‘치료의 종결’이 아니라 호스피스 상담, 통증 조절, 의미요법, 관계 재구성 등 전혀 다른 종류의 케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호로 읽어낸다.

강지연 저자는 201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인공호흡기 제거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과 의사의 방어적 진료를 경험한 것을 계기로, 한국 의료 현장에서 생애 말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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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의 대형 상급종합병원(Z병원) 말기암 병동에서 2년에 걸친 참여관찰 현장연구를 수행하며, 완화의료팀의 일과 환자·가족의 일상을 함께 지켜봤다.

한국의 대형병원 말기암 병동은 이미 말기가 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라기보다 환자들이 점차 ‘말기 환자’로 돼가는 경계적 공간이다. 그러나 이때 ‘말기’라는 단어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종양이나 합병증을 해결하기 위한 수술·항암제 등 동원 가능한 치료 옵션이 모두 소진됐다고 판단되는 시점에야 의사는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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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때부터 통증 조절, 호스피스 연계, 장례 논의, 의미요법과 미술치료 등 말기 돌봄의 다양한 실천이 환자와 가족 앞에 비로소 펼쳐진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는 말 이후에도 말기 환자 곁에서는 많은 활동이 일어난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생명 연장보다는 삶의 질을 중심에 두고 신체적 증상 조절에서 심리·사회적 돌봄, 임종 및 사별 가족 지원까지 전인적인 케어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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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핵심은 관계의 재구성이다. 완화의료팀은 병실을 돌며 차를 권하고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환자·가족과 “친해지기”를 시도한 뒤 각자가 파악한 사정을 모아 회의를 통해 최적의 돌봄을 조율한다. 미술치료와 의미요법 인터뷰를 통해 환자가 자신의 생애와 마음속 이야기를 다시 말하도록 돕는 ‘매듭 풀기’ 작업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게 하고 가족 관계를 회복시키는 치유 과정이 된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완화의료팀은 돌봄의 목적을 ‘좋은 죽음’이라는 결과에만 두지 않고 관계를 생성하고 잇고 확장하는 ‘관계-생성적 돌봄’으로 재정의한다. 임종 후에는 사별 가족 모임을 운영하며 유가족이 슬픔을 나누고 새로운 사회적 지지망을 형성하도록 돕고, 어떤 가족은 돌봄을 받은 경험을 계기로 다시 병동으로 돌아와 봉사자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이 말하는 ‘새로운 안정’은 바로 이런 관계와 돌봄의 망 속에서 얻어지는 정서적, 존재론적 안정이다.

강지연 작가의 관찰은 한국 의료에서 말기 돌봄이 여전히 병원 시스템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Z병원에는 전용 호스피스 병동이 없고 완화의료팀의 사무실과 임종실 규모를 보더라도 말기 돌봄은 병원 경영의 중심 가치라기보다 ‘급성기 케어’에 밀려난 영역이다. 이는 상급종합병원의 설립 목적과 수익 구조가 말기 환자의 충분한 체류와 돌봄보다 병상 회전과 고난도 시술에 맞춰져 있음을 시사한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정책을 넘어 각 개인의 삶에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선 ‘말기’는 나이나 병기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족·의료진의 일상적 실천과 제도의 틈입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산되는 시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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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완화의료팀이 정의하는 좋은 죽음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늘리거나 줄이지 않으면서, 통증이 조절되고 편안한 시공간에서 사회적 관계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의학적 기술만이 아니라, 머리를 감기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듣는 사소한 돌봄과, 서로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말할 수 있는 관계의 회복이다.

책은 ‘환자의 말기’는 돌봄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이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되는 자리라는 사실을 의료 현장의 모습을 통해 증언한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는 선언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연결과 돌봄으로 채울지 묻는 또 다른 케어 플랜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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