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갱년기 여성들과 함께 춤을
의사는 치료를 마치면 불임이 될 거라 말했다. 놀라긴 했지만 슬플 일은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을 생애주기의 일부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숨값으로 난소를 내놓는 건 차라리 이득 되는 장사다. 아까웠던 건 월경이었다. 월경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고통스럽지 않아서 그랬지, ‘여성성’이라는 가치 때문은 아니다. 난소와 자궁을 가진 이에게 월경은 그저 생물학적 현상이고,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은 이에게는 괴로운 일이다. 취약한 이에게는 위험 요소가 덧붙는 일에 불과하다.
예정대로 월경이 끊긴 뒤, 나는 이를 ‘완경’이라 부르는 대신 ‘조기폐경’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닫을 폐와 월경 경. 내게는 완성보다는 갑자기 닫혔다는 뜻이 더 어울린다고 여겼다. 이름 하나를 붙이고 났더니 갱년기 증상이 따라붙었다. 이것에는 한동안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관절을 후비는 통증과 불쑥 등허리를 적시는 열기, 지지는 듯한 따가움은 항암치료의 후유증과 잘 구별되지 않았다. 다들 임신을 못할 거라 했지, 갱년기가 언제 찾아오고 어떤 고통을 겪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갱년기를 위한 생활정보는 검색으로 찾은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마뜩잖았다.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충격·분노·우울·상실감 등은 매우 흔한 감정… 나이 든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자신에게 생겼다는 사실에 대해서 스트레스…” 임신과 히스테리는 여성의 성역할이다. 병원 홈페이지 정보마저 이 지경이었으니, 30대 갱년기 여성은 절망해야 마땅했다. 나는 또 여성이 아니야? 조기폐경을 맞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남의 ‘여성’ 판정이 아니라 이 요란스러운 갱년기를 무난하게 보낼 지혜다.
남성 중심의 의료 지식은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 하나가 열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조기폐경은 뜻밖에도, 밥집이나 술집 앞에서 처음 만난 중년 여성과 나 사이의 허들을 낮추었다. 후우, 밤공기 사이로 뽀얗게 내쉬는 한숨. 불뚝불뚝 씅이 나서 환장하겠어. 안 겪어봐서 모르지? 아유 알죠. 제가 조기폐경이 됐어요.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얘기하자면 좀 길어요. 저기, 언니(또는 이모)라고 불러도 돼요? 뜻밖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나는 여전히 여성이고, 다른 여성을 만난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식당 노동자에게 ‘언니’ ‘이모’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의 직업에는 마땅한 이름이 부여돼야 한다. 언니, 이모라는 호명은 그저 상황에 따라 친밀감을 건네는 나름의 방식이다. 공식적인 역사는 부계로 계승되지만, 친밀함이라는 감정은 모계로 계승된다. 이모상의 얼굴과 고모상의 얼굴이 따로 있고, 장모님 식당은 있어도 시모님 식당은 없다. 다정한 여자 어른, 멋있는 여자 어른, 나를 무조건 지지하는 동성의 어른, 초면이라서 피차에게 친절할 수 있는 연상의 여성 또한 ‘언니’고 ‘이모’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족 개념에 기대는 내 깜냥이 아쉽기도 하지만, 혈연 중심 용어의 경계를 흐리는 시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넘겨짚기로 한다.
‘언니’ ‘이모’들도 물론 젊은 여성의 조기폐경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민이 불편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짧은 대화 속에서 나도 그도 서로를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건강하길 바라고, 나는 그의 환장할 고통을 공감한다. “그 시기만 지나 봐요. 안 하니까 엄청 편해!” 가끔 그들보다 어린 선배가 되어서 깔깔 웃는다. 하필 지금 속 썩이는 자식 푸념에, 어머니의 갱년기를 떠올리며 과거를 반성한다.
이렇게 투박한 대로 갱년기의 여성들과 한바탕 노닥거리는 참이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즐겁다. 다른 조기폐경 여성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르게 문 하나 닫고 나온 여성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당신이 닫고 나온 문 앞에는 어떤 문이 새롭게 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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