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미친 속도 너머, 사유의 공간 연 박지현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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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비롯해 우리 대부분 사유할 시간 없이 몰아붙이는 삶을 살고 있잖아요. 책은, 우리를 저 멀리 어느 곳에든 데려갈 수 있고요. 그래서 책을 읽음으로써 ‘더 멀리’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장 대신 보드라운 스웨터에 앞치마를 두르고, 굳은 긴장 대신 손님을 맞는 미소를 띠고 서른살의 박지현이 말했다. ‘더멀리’. 6년여 서울이라는 전장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그가 고향인 강원도 원주로 돌아와 차린 독립서점 겸 북카페의 이름이다. 2019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텔레그램 엔(n)번방 성착취물의 진실을 파헤친 ‘추적단 불꽃’의 일원으로, 2022년 대선 전후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그는 20대 내내 전쟁을 치렀다.
낙향. 뜻밖의 선택이다. 아니, 존재를 건 결전을 여러 차례 치렀으니 마땅히 낙향해 영혼을 씻어내는 것이 옳다고 해야 할까. 박지현은 6개월의 준비 끝에 올해 8월 원주 행구동의 볕이 잘 드는 땅에 책방을 열었다. 직접 책을 선별해 소개하고, 빵을 굽고 커피를 내려 손님을 맞는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그랬던 것처럼, 몸을 쓴다. 그가 직접 내린 콜롬비아 커피에선 독특한 수박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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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86세대 정치인들에게 용퇴를 요구하고 당내 성폭력을 비판하며 싸울 때, 포털의 뉴스 게시판에는 이런 악플들이 달렸다. “편의점 알바나 해라”, “9급 공무원이나 해라”. 이 직업들을 비하하는 의미도 담겼지만 ‘사회생활도 안 해본 20대 여자애가 뭘 알고 설치냐’는 공격이 내포돼 있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알바도 해봤고 잠깐이지만 여성가족재단에서 풀타임으로 일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찌 보면 부딪혀 가며 정말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 면에서 안정감이 좀 생기더라고요.” ‘생활인의 감각’이 뚜렷해졌다는 뜻이겠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책방, 하면 좀 우아한 느낌으로 생각들 하시지만 그렇지 않더라고요. 처음엔 정말 우당탕탕했고, 이제 좀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자영업 전선에 뛰어든 초보 사장에겐 매일이 도전이다. 어지간하면 빵 종류는 외부 납품을 받으려 했지만 단가 싸움에서 졌다. 요즘엔 빵도 직접 굽는다. 손님이 실수로 잔을 깨거나, 화장실이 막히면 없던 노동이 덧붙는다. 집에 가면 녹초가 된다. 무엇보다 매일 매출 걱정에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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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의 표정은 밝고 온화했다. “서울에 있을 때 오랫동안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여러 알 먹었는데 원주에 와서 줄여오다가 최근 전부 끊었다”고 했다. 여의도 정치를 펼치는 동안 그에게 쏟아진 테러 수준의 언어폭력과 비난을 겪는다면 누구나 마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깨 겯고 걸어주는 이들이 있었다지만, 원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며 비로소 그는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책방에서는 ‘오늘 손님 몇명 왔지? 커피 몇잔 내렸지? 책이 몇권 나갔지?’ 생각하다 보면 하루가 가거든요.” 그가 ‘나도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다’는듯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지역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책방은, 평일인데도 인터뷰를 나누는 사이 만석이 돼 있었다.

책방은 박지현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전, 일종의 정거장 같은 존재”기도 하다. “여의도는 서로 물어뜯고 물어뜯기는 싸움판이 됐고, 발언의 진의를 생각하기보단 진의를 왜곡하기 바쁜 곳이 됐다고 생각해요. 저도 제가 생각해온 상식이나 바라왔던 정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실현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다 너무 힘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는 담담히 정치권에서 겪은 환멸에 대해 돌아봤다. 20대에 겪은 시행착오와 속도를 정비하고, 사유와 소통의 시간을 다져가는 공간. 그렇게 더 멀리 가기까지 힘을 쌓는 공간이 책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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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책을 나누는 일을 하게 되면서 그는 서울과 현실 정치의 미친 속도에서 해방됐다. “서울 자체가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도 있고, 정치할 때엔 당장 터지는 이슈에 대응하기 바빴어요. 우리 모두에게, 좀 더 깊은 호흡의 글이든 명상이든 그런 것들을 누릴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 같아요. 저부터도 사유하는 시간을 만들고,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책방 곳곳엔 그런 바람이 빼곡했다. 정치와 인권, 글쓰기, 문학을 아우른 ‘책방지기’의 관심사 안에 가지런히 배치된 책들엔 책방이 손님들과 공유하고 싶은 ‘사유’가 메모로 붙어 있다. 책방을 찾은 이들이 “서점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고 한다.
예상과 달리(?) ‘아이를 너무 좋아한다’는 그는 북카페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하이체어 형식의 아기 의자도 두개나 배치해 뒀고, 어린이책도 두루 구비했다. 어른들이 미리 돈을 내고 청소년이 마음에 드는 책을 가져가는 ‘어른이 책 사줄게’ 프로젝트도 함께하고 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공간, 책방은 곧 박지현이라는 ‘활동가·정치인·청년·여성·자영업자’가 일궈온 내면을 닮아 있었다.

책방 사장이 됐지만, 그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놓지 않았다. 누가 ‘발탁’한 정치가 아니라, 스스로 쌓아가는 정치를 원주에서 그려갈 참이다. 그럴 수 있는 용기도 책으로부터 얻었다. “정치하면서, 저 책을 정말 많이 펼쳐 봤어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서가에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진열돼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거든요. 대의에 대한 헌신을 뜻하는 열정, 변명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그리고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균형적 현실 감각. 베버가 말한 세가지 가운데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책임감과 열정은 있는 것 같으니 균형적 현실 감각을 길러야겠다, 그게 참 부족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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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로 물어뜯기에만 골몰한” 정치인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는지 물었다. 손님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은유 작가의 ‘있지만 없는 아이들’(창비)이지만, 정치인들에겐 주저하지 않고 다른 책을 권했다. 2023년 출간한 자신의 책 ‘이상한 나라의 박지현’(저상버스)이다. 정치에 입문한 뒤 그가 겪은 풍파와 그 가운데서도 잃지 않았던 정치적 희망에 대해 썼다.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는 정치인”들에게 그는 20대 여당 비대위원장 박지현의 말을 다시 건네고 싶은 듯했다. 언젠가 다시 그 전쟁의 복판에 뛰어들 자신을 향해서도. “이 사회의 약자들, 그리고 시민과 함께 순진한 슬픔과 순진한 기쁨을 나누며 행복을 찾아 가는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싶다. 순수와 다감을 지키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과 함께 원칙과 강인함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험난하고도 어려운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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