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보람, 다석길을 열고 가신 이···박영호 선생을 기리며[기고]
다석 류영모(1890~1981)의 제자 박영호(1936~2026) 선생이 지난 10월 11일 오후 7시 39분 숨을 돌렸다. 향년 90세. 선생은 부고도 알리지 말고, 빈소도 차리지 말며, 부의금도 받지 말라는 유지를 남겼다. 묘역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유족과 제자들 뜻에 따라 수원 연화장 공원묘역에 작은 이름표 하나 남겼다. 평생 제나를 벗고 얼나로 솟나기를 갈망했던 구도자의 마지막 길이다. 이제 그는 한아님, 한웋님 품으로 돌아갔다.
박영호 선생. 그는 다석학회 고문이었고, 다석사상연구회 회장이었다. 그는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을 받은 제자로 다석사상을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김종길 제공
박영호는 다석에게 ‘마침보람’을 받은 제자다. 마침보람은 오늘날의 졸업장이다. 다석의 많은 제자 가운데 스승이 직접 ‘마침보람’이라 적은 봉함엽서를 건넨 이로 알려진 사람은 박영호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을 마쳤다’는 증명도, 다른 제자보다 ‘뛰어나다’는 인정도 아니다. 스승에게 매달리지 않고 ‘홀로 진리를 깨쳐 나갈 수 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다석이 제자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은 가르침이 아니라 스승으로부터의 독립이었던 셈이다.
다석에게는 큰 제자들이 많았다. 으뜸 제자로 꼽히는 신천 함석헌은 스승의 씨알사상을 역사와 민주주의, 평화철학으로 확장했다. 김흥호는 <다석일지>를 처음 해제하며 다석 종교철학을 학문과 강단으로 이었다. 학산 이정호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역학을 탐구하면서 다석 한글사상과 통하는 사유를 열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은 가난과 섬김을 삶으로 실천했고, 무등산에서 목장을 일군 김정호,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 송기득, 동광원의 수녀 언님들도 저마다 다석의 뜻을 몸으로 받들었다. 농촌과 생명운동을 실천한 류달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하나의 교리를 따르는 학파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다석에게서 받은 말씀을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일으켰다. 박영호는 그 가운데서도 스승의 생애와 사상을 온전히 밝히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고 세상에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다석에게 직접 배운 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난 뒤 이제 자연의학과 농사, 몸성히의 실천을 이어가는 임락경 목사가 증언자로 남아 있다. 박영호의 귀천(歸天)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다. 다석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세대의 소중한 자리가 ‘비었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박영호 선생은 자하문 밖 구기리에 있던 스승의 집을 찾아가 말씀을 들었다. 맨 왼쪽이 박영호 선생다. 오른쪽은 다석 부부. 김종길 제공
선생님 찾아 나선 구도길
박영호 생애는 처음부터 구도행이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길을 밝혀 줄 ‘선생님’을 찾았다. 그 길은 전쟁의 참혹한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아직 어린 학생이었다. 학도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살아 있는 몸들이 한순간에 주검으로 바뀌는 참혹한 현실은 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불면과 신경쇠약이 뒤따랐다. 죽음이 무엇인지, 인간은 왜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이었다. 톨스토이 역시 삶의 무의미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이다. 박영호는 그 책을 통해 신앙에 눈떴다. 그에게 종교는 교회에 다니거나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참된 삶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후 그는 톨스토이 저작과 동서양 종교철학을 탐독했다.
1956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읽은 것은 또 하나의 전환이었다. 그는 함석헌에게 편지를 썼고, 마침내 스승을 만났다. 함석헌의 가르침 아래 천안 씨알농장에서 약 3년 동안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했다. 성경과 사서삼경을 읽었고, 톨스토이와 간디의 삶을 익혔다. 농사와 공부가 둘이 아니고, 신앙과 생활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그런데 그토록 존경하던 함석헌에게도 스승이 있었다. 다석 류영모였다. 박영호는 1959년 서울 YMCA 연경반에서 다석의 금요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다석은 성경을 말하다가 노자를 불러왔고, 불교를 이야기하다가 공자의 중용을 논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불교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유교와 도교를 넘어 한아님으로 나아가는 길을 밝혔다. 박영호에게 그것은 새로운 사상의 문이 열리는 경험이었다.
그는 경기도 의왕 청계산 자락의 황무지 6천여 평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그러면서 매주 서울 YMCA를 찾았고, 구기동 다석의 집에도 드나들었다. 몸은 땅을 일구고 얼은 하늘을 우러렀다. 노동과 사색을 함께하는 삶이었다. 톨스토이에게서 신앙의 물음을 얻었고, 함석헌에게서 씨알의 삶을 배웠다면, 다석에게서는 그 모든 물음을 한길로 꿰는 말씀을 얻었다.
그러나 1965년 다석은 뜻밖에도 박영호에게 ‘단사(斷辭)’를 명했다.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박영호는 눈물을 흘리며 스승을 떠났다. 다석이 왜 단사를 명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스승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제자로 남지 말고, 스스로 깨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스승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스승의 참뜻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박영호는 홀로 공부했다. 다섯 해 동안 사색과 성찰을 거듭하여 1970년 <새 시대의 신앙>을 펴냈다. 스승에게 바친 그 책은 자신이 깨친 믿음의 결실이었다. 그리고 다석에게서 ‘마침보람’이라는 답을 받았다. 스승이 알을 쪼아 주고 제자가 안에서 껍질을 깨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사건이었다. 다석의 쪼음은 단사였고, 박영호의 쪼음은 홀로 깨친 신앙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공부에서 제 뜻으로 진리를 밝히는 공부로 넘어간 것이다.
2023년 5월, 다석 류영모 묘소 참배를 마치고, 강원도 화천에 사는 김경희 언님 댁에서 박영호 선생을 모시고 말씀을 청해 들었다. 앉은이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락경 목사, 세 번째가 박영호 선생이다. 맨 왼쪽이 김경희 언님, 임락경 목사 뒤가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 그 옆이 필자, 한 사람 건너 뛰어 다석사상연구회 총무를 맡고 있는 김성언 언님, 그 외 정수복, 김용하, 김우영 등이 보인다. 모두 다석사상연구회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김종길 제공
다석을 다시 낳은 사람
마침보람을 받은 뒤 박영호에게는 또 다른 일이 주어졌다. 다석 전기를 쓰는 일이었다. 1971년부터 그는 스승의 생애와 사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석이 남긴 일지와 자료를 살피고, 직접 말씀을 들으며 구술을 채록했다. 다석이 읽은 책을 찾아 읽었고, 스승의 사유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추적했다. 단순히 일화를 모은 것이 아니라 한 사상가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 사상의 뿌리와 줄기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1981년 다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1985년에 펴낸 <씨ᄋᆞᆯ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은 다석 연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상·하)>,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다석의 일생은 더욱 촘촘하게 기록되었다. 그가 남긴 전기와 평전은 한국 근현대 사상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기초 문헌이 되었다.
박영호의 업적은 전기에 머물지 않는다. 1990년대 <문화일보>에 다석의 사상을 325회에 걸쳐 연재한 일은 각별하다. 대중에게 낯설었던 다석의 한글철학을 신문 지면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연재를 바탕으로 <다석사상전집(전7권)>을 펴냈고,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 류영모 명상록>, <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등을 엮고 풀었다. 다석의 말과 글을 흩어진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고 서로 잇대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0년에는 주규식이 기록한 강의 자료를 바탕으로 <다석 마지막 강의>를 펴냈고, 2015년에는 <다석 씨알 강의>를 출간했다. <다석중용강의>에서는 <중용>을 다석의 관점으로 해석했으며,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풀이하면서 불교와 기독교의 깊은 만남을 탐구했다. <죽음 공부>와 <깨달음 공부>에서는 다석이 평생 실천한 구도의 뜻을 다시 밝혔다.
이 방대한 저술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다석은 무엇을 깨쳤고, 그 깨침을 어떤 말로 남겼으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박영호는 이 물음에 평생 답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그의 삶은 다석사상 집대성에 집중되었다. 전기를 쓰는 사람에서 어록을 엮는 사람으로, 어록을 해석하는 사람에서 종교철학 체계를 세우는 사람으로 나아갔다.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다석사상을 종교 혼합이 아닌 ‘일원다종교주의’의 사유로 읽어낸 데 있다. 다석은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두루 공부했으나 어느 하나에 갇히지 않았다.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말과 형식을 지니고 있어도 궁극에는 ‘하나의 참을 향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박영호는 이를 다석사상의 중심에 놓고 체계화했다. 예수와 석가, 공자와 노자가 서로 다른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길에서 하나의 근원을 우러른다는 이해다.
물론 종교마다 다른 역사와 교리, 신관을 하나로 환원할 수는 없다. 다석의 일원다종교주의는 그 차이를 지우는 종교 통합론이라기보다, 차이를 넘어서는 참의 근원을 묻는 사유에 가깝다. 박영호는 그 근원을 ‘하나’와 ‘얼나’의 문제로 풀었다. 그의 저술이 지닌 힘은 종교 간 비교를 넘어 한 인간이 어떻게 저 홀로 서는 깨침에 이를 수 있는가를 끝까지 물었다는 데 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으로부터 받은 ‘마침보람(졸업장)’이다. ‘???침보???’이라 써 있다. 봉함엽서에 써서 보냈다. 김종길 제공
성천아카데미 스승이 되다
박영호는 류달영이 설립한 성천문화재단 성천아카데미에서 다석사상과 노장철학을 강의했다. 다석사상연구회 강연과 연구모임을 통해 후학을 길렀다. 스승에게 직접 들은 말을 자신이 풀어 다른 이들에게 전했다. 그에게 강의는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깨치는 공부였다.
다석의 말씀은 어려웠다. 한글 소리와 뜻을 새롭게 엮었고, 한문과 산스크리트어, 성경 말씀과 동양고전의 깊은 뜻이 한데 어우러졌다. <다석일지>와 강의를 처음 읽는 사람은 그 말뜻을 곧장 알아듣기 어려웠다. 박영호는 그 어려움 앞에서 해설자의 길을 택했다. 말씀의 뜻을 풀고, 그 말이 어느 경전과 이어지는지 살폈으며, 추상으로 남지 않도록 삶의 사례로 설명했다.
스승이 들려준 말씀을 제자의 말로 밝힌 것이다. 다석 말씀이 씨앗이라면 박영호 강의는 그 씨앗이 새로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었다. 그는 다석사상을 특정 학문 분야나 종교의 전유물로 가두지 않았다. 누구든 공부하고, 깨치고,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말씀으로 전하려 했다.
여기서 박영호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다석사상 보존자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해석자였다. 스승의 언어를 그대로 지키는 일과 그것을 오늘의 말로 풀어내는 일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박영호는 그 긴장을 피하지 않았다. 때로는 한 뜻말을 여러 경전과 비교했고, 때로는 어려운 사유를 분명한 개념으로 정리했다. 다석 말씀이 한 사람의 깨침에서 시작되었다면, 박영호를 거치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배우고 토론할 수 있는 학문으로 옮겨졌다.
2001년 두레에서 펴낸 <多夕 柳永模 명상록 : 진리와 참 나(我)>표지다. ‘참’을 꿍꿍하고, 말숨을 트고, 말슴을 세운 다석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제나 벗고 얼나로 솟나다
박영호가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 준 다석의 뜻말은 ‘제나’, ‘몸나’, ‘얼나’ 등이다. 이 말들은 본디 다석 사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박영호는 그것들을 하나의 분명한 설명 체계로 세우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냈다.
‘제나’는 제가 저라고 붙들고 있는 나다. 제 욕망과 제 생각, 제 소유와 제 이름에 매여 있는 나다. ‘몸나’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육신의 나다. 몸을 지닌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 안에서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러나 다석이 말한 몸나는 없애 버려야 할 몸이 아니다. 몸에만 매달려 저를 온통 육신으로 여기는 집착이 문제다. 박영호는 이 몸나와 제나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탐욕과 자기중심성이 어떻게 인간을 참된 생명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밝혔다.
반면 ‘얼나’는 하늘 얼을 받아 솟나는 참나다. 몸이 낳은 나를 넘어서 얼로 다시 나는 것이다. 다석은 이를 ‘솟나’와 ‘거듭남’의 문제로 생각했다. 박영호는 이 뜻을 기독교의 중생(重生), 불교의 법신(法身), 동양철학의 참된 자기와 견주어 설명했다. 제나에서 얼나로 나아가는 길은 자신을 없애는 허무가 아니다. 붙박인 자아를 벗고 한아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새 삶이다.
그는 이를 관념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루를 하나의 일생으로 살아가는 ‘일일일생(一日一生)’, 식욕을 줄이고 몸을 다스리는 ‘하루 한 끼’, 죽음 앞에서 삶을 온전히 깨닫는 ‘죽음 공부’를 함께 강조했다. 죽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오늘의 삶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는 뜻이다.
‘없이 계시는 한아님’ 역시 다석사상의 깊은 자리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어떤 형상으로도 한아님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없이 계심이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박영호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불교의 공(空), 도교의 무(無)를 서로 견주면서 다석이 말한 절대의 뜻을 설명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붙박인 모습으로도 가둘 수 없는 참의 근원이다.
다석의 ‘가온찍기/가온찌기’와 ‘가온’의 사유도 빼놓을 수 없다. 가온은 양쪽의 가운데만을 뜻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치우침을 벗고 참의 중심을 깨치는 자리다. 그 가온에 제 마음을 찍어 한아님과 잇대려는 일이 가온찍기/가온찌기다. 박영호는 이러한 다석 사유를 <중용>의 성(誠)과 중(中), 종교의 궁극에 대한 물음과 연결하여 해설했다.
또한 ‘씨ᄋᆞᆯ’은 한 생명 안에 깃든 하늘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씨ᄋᆞᆯ은 작지만 그 안에 온 생명의 싹을 품는다. 함석헌이 씨ᄋᆞᆯ을 역사와 사회를 움직이는 민중의 주체로 발전시켰다면, 다석은 그 씨ᄋᆞᆯ 안에서 한아님의 얼이 어떻게 솟나는지를 물었다. 박영호는 씨ᄋᆞᆯ의 삶이 곧 얼나의 삶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렇게 보면 박영호의 뜻말 풀이는 단순 번역이 아니다. 스승이 일으킨 말을 다른 경전과 사상의 맥락에 놓고 읽는 작업이었다. 때로 다석 사유를 명료하게 했고, 때로는 다석의 여러 갈래 사유를 얼나 중심으로 집약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다석학은 다석이 직접 남긴 뜻말과 박영호가 해제하고 확장한 뜻말을 정밀하게 구별하면서도, 그 사이에서 일어난 창조적인 사유를 함께 읽어야 한다.
2025년 5월, 수운에서 스승의 날 초청 강연을 마치고 선생님과 함께 걸었다. 날은 맑았고, 선생님 영혼은 더 맑았다. 김종길 제공
‘박영호 아카이브’와 다석학파
박영호는 평생 다석을 공부했고, 다석을 기록했으며, 다석을 다시 세상에 전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그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후학들이 시작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박영호 아카이브’를 구축해야 한다. 그가 평생 수집한 다석 관련 자료는 한국 근현대 종교철학의 중요한 사료다. 다석 친필 일지와 서신, 강의 노트, 구술 채록, 저술 초고, 교정지와 출판 자료, 성천아카데미 강의 자료와 제자들의 기록까지 현황을 조사해야 한다. 원본의 소재와 소장 이력을 확인하고, 자료를 분류하고, 디지털로 보존해야 한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있다면 학술 검증을 거쳐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그와 함께 박영호 전집을 기획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이 여러 출판사를 거쳐 개정되면서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다석 원문과 박영호 주해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밝혀야 한다. 특히 <다석일지>와 어록, 강의록을 교차 대조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석사상을 연구하려면 다석의 말과 제자의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박영호의 공헌을 온전히 평가하려면 그가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무엇을 새롭게 해석했는지 밝혀야 한다.
이것은 박영호 개인을 기념하는 사업을 넘어 ‘다석학파’의 학문적 토대를 세우는 일이다. 다석에게서 함석헌으로, 김흥호와 이정호로, 박영호와 여러 수행자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학문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각 제자가 무엇을 받아들였고, 무엇을 달리 해석했으며, 어떤 새로운 뜻말을 일으켰는지 살펴야 한다. 그럴 때 다석학파는 스승의 말씀을 반복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깨침이 만나며 자라나는 살아 있는 학문이 된다.
<다석일지> 속 천부경 풀이다. 1964년 4월 22일 일지다. 1990년 홍익제에서 <다석일지> 총4권이 아카이브북으로 펴냈다. 그야말로 원본 그대로 묶었다. 이처럼 ‘박영호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석학파 연구 토대가 마련될 터이다. 김종길 제공
박영호가 남긴 유산은 작지 않다. 다석 생애를 기록한 전기, 흩어진 말씀을 모은 어록, 깊은 뜻을 풀어낸 주해, 종교와 종교를 잇대어 읽은 사상 총서, 그리고 수많은 강의가 있다. 그 저작들 사이에는 한 사람이 평생 매달린 질문이 흐른다. 인간은 어떻게 참나로 살 수 있는가. 몸의 죽음을 넘어 얼의 삶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서로 다른 종교의 말씀이 어떻게 한아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가. 이제 그 질문은 후학들의 몫이 되었다.
박영호가 받은 ‘마침보람’의 참뜻을 생각한다. 마침은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이다. 스승에게서 배움을 마치는 것은 스승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스승의 뜻으로 홀로 서는 일이다. 다석은 박영호에게 마침보람을 주었고, 박영호는 한평생 그 뜻을 살아냈다. 이제 박영호의 제자들과 다석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이 새로운 마침보람을 받을 차례다.
그것은 스승을 기리면서도 스스로 공부하고 깨쳐 새로운 사유를 일으키는 일이다. 박영호가 남긴 기록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의 해석을 넘어 다석에게 묻고, 다석을 넘어 오늘의 삶을 묻는 일이다. 다석학파는 그렇게 이어져야 한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던 박영호. 그러나 그는 이름보다 오래 남을 말씀의 길을 닦았다. 흙을 일구며 얼을 키웠고, 스승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도록 평생 글을 썼다. 이제 그의 몸나는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가 밝힌 얼나의 길은 남아 있다.
다석의 제자로 살았던 박영호가 이제 스승이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 받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스승의 말씀을 외우는 데 그치지 말고, 제 삶에서 다시 깨쳐 새 길을 열라는 것 아닐까. 마침보람. 배움이 마친 자리에서 새로운 깨침이 시작된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