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게 자란 나, 사과받고 싶어요”…단지 기분 나쁘다는이유로? [이진송의 아니 근데]
‘1도 모르겠다’는 밈의 원조가 된 방송의 한 장면. MBC 유튜브 갈무리
‘밈’은 인터넷이나 SNS 등지에서 유행하는 각종 파생 문화와 유행어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사용한 것이 어원으로, 인간의 유전자가 몸을 통해 유전되듯이 의복이나 음식, 의식과 관습, 예술과 건축 등의 문화적 요소도 모방과 확산을 통해 일종의 유전적 진화를 거친다는 뜻이다.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필로소픽, 2024)에서 김경수는 영화, 컴퓨터처럼 세계를 보고 듣는 방식을 바꾸는 매체의 계보에 인터넷 밈을 배치하며 이것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에게 새로운 언어이자 중요한 문화적 토대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에 밈은 일상이 되었으며 어떤 밈은 오래 살아남아서 새로운 고전이 된다. 가령, 2014년 가수 헨리가 <진짜 사나이>에서 “하나도 모르겠습니다”를 “모라고 했는지 1도 몰으겠습니다.”라고 쓴 이후 12년이 지났다. 2026년 드라마 <맨 끝줄 소년>(넷플릭스)에서 ‘무려’ 국문과 교수 허문오는 “네가 뭐라고 하는지 1도 모르겠다!”라고 육성으로 외친다. 새로운 언어로서의 인터넷 밈은 시대와 상호작용하고 침투하고 훼손하고 진화하며 과거와는 또 다른 양상의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오늘은 밈 두 개를 엮어, 그 유행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살펴본다. 바로 “귀하게 자란 내가~”와, “사과받고 싶어요.”이다.
A2O 라이트의 ‘네온’을 패러디한 ‘미혼앤비혼’ 인공지능(AI)영상 콘텐츠. 유튜브 갈무리
유행하는 인터넷 밈은 곧 그 시대의 결을 읽는 단서다. ‘잉여’, ‘갓생’, ‘금수저’,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요?)’의 계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존을 둘러싼 청년 세대의 감정과 태도를 반영한다. 신인 걸그룹 A2O Lite의 노래 <Neon>에서 ‘Neon and Beyond’라는 가사의 후렴구가 ‘미혼 앤 비혼’ 또는 ‘이혼 앤 비혼’이라고 들린다는 감상은 순식간에 밈이 되어 각종 패러디를 쏟아내는 중이다. 30대의 절반 이상이 비혼이고, ‘비혼’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익숙한 현 상황이 밈에 날개를 달았다. 동시에 밈은 시간성을 뒤섞어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지우는데, 과거의 영상이나 자료를 발굴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혼 앤 비혼’의 바이럴이 처음 터진 것은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2005) 속 주인공들이 노래에 맞춰 춤추는 AI 영상이다. 이 드라마가 일명 ‘교양 밈’으로 지금까지 유명세와 인지도를 유지한 까닭에, 영상은 대중적 파급력을 행사한다. 2026년에도 활발하게 쓰이는 <무한도전>, <순풍산부인과>, <야인시대>의 ‘짤’이나 90년대 뉴스에서 파생된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처럼,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에 밈은 문화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귀하게 자란 내가 이런 걸 봐도 될까?”는 2025년 하반기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다. ‘귀하신 분이 누추한 곳에’라는 관용어를 뒤집어, 누군가가 품위 없는 행동을 할 때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이’로 쓴 용례를 계보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레거시 미디어가 후퇴하고 1인 미디어가 보편화되면서 소위 ‘날 것의’, ‘B급의’ 콘텐츠가 범람하기 시작한 시대적 맥락이 있다. 저예산, 무(無)심의 영상과 이미지들은 자유로운 매력과 저품질이라는 양날의 검이다. 물론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만 추구하진 않는 것이 인류의 오랜 속성이라, 허접하거나 유치하고 누추한 작품은 시대 불문 존재했다. (또한 작품의 수준을 판단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규범적인 권력과 결합하기에 도식적으로 고급과 저급을 분류할 순 없다) 그런데 과거의 B급 감성 콘텐츠는 최소한의 필터링이 있었고 소수의 마니아가 직접 찾아서 본 것과 달리, 인터넷과 알고리즘의 시대에 수용자는 불시에 그것을 ‘맞닥뜨린다.’ 팬데믹 시절 웹 예능 <피식대학>의 콘텐츠였던 <비대면 소개팅>이 역설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해 보자. 일부러 당혹스러운 비주얼을 연출하고, 과장되게 느끼한 발언을 연발하는 카페 사장 최준 캐릭터에게 시청자들은 ‘배꼽 냄새 같다’라고 비난하다가 점점 그 매력에 빠진다. 인기를 끌면 숏폼이 무한대로 퍼져나가고, 절규와 웃음이 확산된다.
웃음의 기본 조건은 하찮은 대상을 조롱하는 위계이기에, ‘나’의 우월함은 ‘귀한 집 자식’ 같은 관용구에 기대어 구성된다. 당연하게도 이 밈은 실제로 귀하게 자랐는지와는 무관하게, 해당 콘텐츠의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이 목적이며 그 파괴력을 약간의 폭력성과 연결한다. 내가 그것을 보고 웃은 게 아니라 ‘봄’을 ‘당했고’, “귀하게 자란 나”가 이 망측한 것을 보고 심리적 손해를 입었으니 “사과받고 싶어요.” 이 역시 진짜 사과받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콘텐츠가 ‘얼마나 괴상한지(그래서 웃긴 지)’ 드러내는 표현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반응을 노리고 제작한 콘텐츠이니 ‘사과받고 싶어요’는 제작자로서 포상이고, 수용자로서는 내 감정을 대변하는 동시에 또 다른 웃음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창작과 감상은 본래 가해와 피해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엉뚱한 지점에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뜬금없고, 그런데 해당 작품이 워낙 희한하다 보니 그 감정이 이해는 되고, 웃으라고 만든 콘텐츠에 정색하는 반응이 또 웃기고, 그런 복합적인 재미가 “사과받고 싶어요”에 깃든다. 실제로 “사과받고 싶어요.”는 “사과해요 나한테!” 밈의 후발 주자로, “사과해요 나한테!”는 원작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무 잘못이 없는 상대에게 억지를 부리는 장면을 패러디한 데서 비롯되었다.
귀하게자란 내가 이런걸 봐도 될까?. 유튜브 갈무리
여기까지는 밈을 순수하게 재미로 사용하는 현상이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밈’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시대정신이 언제나 섞여 있어”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귀하게 자란 내가 사과받고 싶은” 욕망은 예술을 향유하거나 타인과 관계 맺을 때 대두되는 오늘날의 문제점과 밀접하다. 두 밈은 기본적으로 ‘나’를 피해자로 설정하고, ‘기분이 상함’을 사과를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차원으로 이해한다. 오랫동안 감정을 무시하고 억눌렀던 한국 사회에서, 감정은 주관적이고 그 자체로 정당하다는 심리학적 지식이 많은 이들을 구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정을 판단하지 말고 수용하라는 의미이지, 그 감정을 유발한 존재가 잘못했고 나는 사과받고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사과받고 싶어요.”는 이런 요구가 터무니 없다는 전제 하에 웃기지만, 충격! 진심으로 ‘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사과 받으려는 사람들이 실재한다!
오쓰카 에이지는 <감정화하는 사회>(선정우 역, 리시올, 2020)에서 감정 언어가 공적 담론을 장악하는 현상을 고찰하며, 이를 ‘감정화’라는 단어로 개념화한다. 감정화는 좋음/싫음, 쾌/불쾌, 감동/혐오 같은 감정이 판단의 주된 근거가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인터넷은 만인에게 자아를 표출할 공간을 개방했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의견이나 주장보다 감정이 주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을 불편하게 하는 언어”는 환영받지 못하고, 많은 수용자가 기분 좋은 감정을 제공하는 언어만을 선호하게 된다. 오쓰카 에이지는 전후 일본에서 천황이 국민의 슬픔과 불안을 달래는 감정 관리자 역할을 하도록 요구받으며, 치유와 위로를 제공하였기에 공적 역할이나 정치적 비판을 유예할 수 있었다는 예를 든다. 감정적으로 ‘좋은’ 경험을 제공하여 많은 것들을 봉합하고 불리한 문제를 약화한다면, 반대로 감정적으로 ‘나쁜’ 경험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정당한 의견이나 논의도 폄하될 수 있다. 오쓰카 에이지는 이를 쾌적하고 편리한 경험만을 제공하는 플랫폼 자본주의 비판과 연결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귀한 나’는 원래의 뜻대로 애지중지 양육된 사람이 아니라, ‘감히 기분이 상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나’라는 뜻이다. 도덕적이지 않은 소재를 예술에서 다루면, 그것이 작품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와 무관하게 소재 자체가 ‘빻았다’, ‘불쾌하다’라고 비난한다. 작품 내에서 이 불쾌함이 의도하거나 구성하는 효과는 무엇인지 생각하거나 논의할 기회는 피해자의 고통이나 트라우마 카드로 차단한다. 청소년 임신이나 정신 질환, 성 착취는 누군가의 삶이기도 한데, 그것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예술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웹소설이나 웹툰처럼 회차 결제하며 보는 작품에서, 전개가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별점 테러를 하거나 환불을 요구한다.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어느 정도 수습하더라도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는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니 물고 늘어져야 한다. 네가 괴롭거나 끔찍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는 자체가 스트레스이자 ‘나’에 대한 폭력이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세상에 나쁜 개는 없듯, 기분이 상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없다.
오쓰카 에이지는 좋은 감정만을 추구하는 감정화가 권력관계와 불평등 구조를 은폐한다며, ‘감정 바깥에서 말하기’와 ‘불편함을 남기는 언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일부러 망측하게 만든 콘텐츠를 보며 실컷 낄낄거리되, 나의 심기에 거슬리는 불편과 불쾌가 ‘무고한 나’를 공격하지 않도록 차단한다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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