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나으라”는 시선 넘어…“이 세계에도 기쁨이 있어요”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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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가족 ‘불행’에 가두는 시선
비장애 늘 행복하다는 것과 같아
“어서 나으라”는 말 속 ‘장애 혐오’
“사람들은 잘 모르죠, 이 세계에도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걸.”
중증 지적장애 아들을 키우는 지인이 종종 하는 말이다. 그의 아들은 출산 과정에서 뇌 손상을 입어 지적장애 판정을 받았고, 10대 중반인 지금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처음부터 순순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강남의 ‘공부 지상주의’ 부모 밑에서 자라 정치부 기자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장애’는 평생 무관하고 무관심한 단어였다. 그래서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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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도 그만두고 인간관계도 다 끊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죽음만 생각하는 밤들을 수년간 보냈다. 특히 집에서는 뉴스를 켜는 것조차 금기였다. 자신이 잘 아는 정치인들과 기자들은 ‘저기’에 있는데 왜 자신만 ‘여기’에 있는지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현관문을 박차고 세상에 나오게 됐다. 아들이 입학한 초등학교에서 일부 학부모들이 아들의 퇴학을 요구하는 진정을 교육부에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인 양 늘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만 되뇌며 살아왔지만, 공립학교의 책상 하나 내어주지 않는 세상에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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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펜을 잡았다. 글을 쓰고 책을 펴내고 강연을 하면서 인권운동가로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키우며 느끼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들은 자녀를 키울 때 귀여운 아기 짓을 3~4년이나 보잖아요. 그런데 저희 부부는 그걸 지금까지도 볼 수 있거든요. 뽀로로만 틀어줘도 엉덩이춤을 추고, 아직도 아기처럼 품에 안기죠.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 서로 웃을 일이 뭐가 있어요? 사이만 나빠지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은 아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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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눈물을 흘리며 보낸 많은 밤들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웃으면서도 살짝 눈물이 났다. 하지만 나 역시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나에게도 중증 지적장애 조카가 있기 때문이다. 30대인 조카의 정신연령은 4살 정도다.
다른 조카들이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며 하나둘씩 부모 곁을 다 떠나가는 동안, 이 조카만은 여전히 부모 곁에 머물고 있다. 다른 조카들이 입시에 취업에 육아에 바쁘다고 집안 경조사의 ‘프로 불참러’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이 조카만은 늘 부모의 손을 잡고 모든 대소사에 참석한다. 그리고 이 조카는 우리를 자주 웃게 만든다. 심각한 가족회의 때도, 슬픈 장례식 때도 우리는 조카의 너무나 정직하고 천진한 표현 때문에 한바탕 웃으며 긴장과 슬픔을 덜어냈다.
장애인 가족은 늘 불행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비장애인 가족은 늘 행복하다고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생각이다. 장애인 가족에게도 기쁨과 행복이 있는 이유는, 그 속에도 성장과 배움이 있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좀처럼 들어가보지 못하는 삶의 깊은 영토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세상의 기준도, 남들과의 비교도, 성공과 성취의 잣대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생의 근본적인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왜 살아야 하는가?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끝내 책임져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 부모들의 매일은 그렇게 실존적 질문의 연속이다. 그 질문들은 본질적 삶에 대한 가속페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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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나 가족을 불쌍하거나 불행하게만 보는 시선은 너무 납작하고 얄팍하다. 그들은 생의 본질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진검승부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위로’라고 건네는 말들이 그의 힘을 꺾을 때가 많다.
“아들이 발달장애인이에요? 얼마나 힘들까, 힘내세요.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올 거예요.”
이런 말을 들으면 그는 난감하다. ‘음, 꼭 힘들어야 하나? 나는 때때로 힘들지만 대체로 즐겁고 행복한데….’
더 난감한 말도 있다. 그의 아들에게 “어서 나으라”는 격려다.
아픈 사람에게 나으라는 것은 위로이지만, 발달장애인에게 ‘나으라’는 것은 장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아들이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장애를 나아서 없애야 할 질병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장애 혐오’가 스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아들에게 “이놈~ 엄마 힘드니까 밥 조금씩만 먹고 너무 빨리 크지 말어”라고 말한다. 자녀를 부모를 힘들게만 하는 존재로 취급하며 성장마저도 가로막는 이런 말은 위로는커녕 상처가 된다.
장애 자녀들도 그들의 속도로 성장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그 한걸음 한걸음은 부모들에게 환희와 경이다. 그는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바지 한쪽에 양다리를 다 넣던 아이가 오늘은 각각 발을 한쪽씩 바르게 넣어서 바지를 입어요. 환호성이 터져 나오죠. 내 아들의 사소한 발전이, 내 동생들이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기뻐하던 우리 엄마의 기쁨과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커요.”
그는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배려의 말들’ ‘아들이 사는 세계’ 등을 펴낸 류승연 작가다. 그의 삶은 영화 ‘그녀에게’로도 만들어졌다. 책 출간을 계기로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그를 개인적으로도 몇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고통이 인간을 어떻게 성숙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보석 같은 기쁨을 발견해내는지를 목격한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기고가 김이후 afterthislife@nate.com
김이후 작가 l 언론사에서 사회부, 문화부 기자로 일한 뒤 지금은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먹고산다. 현재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누구라도 찾아와서 고민을 얘기하면 ‘정확한 위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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