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주한미대사관 직원 헨더슨의 위대한 기록 [금자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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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가지 말았어야 했다.
전철 1호선 신이문역에서 내려 핸드폰으로 네이버 길 찾기를 켰다. 500m 거리가 나왔다. 5월 하순의 아침인데도, 햇빛이 쨍쨍했다. 교수님이 문자로 찍어준 오피스텔 11층으로 가야 했다.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1층 카페에 들러 별생각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오피스텔 내부는 오래된 대학교수 연구실 같았다. 창문을 제외한 벽면이 책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의자 위와 바닥에도 온통 책과 서류가 쌓여있었다. 2005년 정년퇴임과 함께 대학 연구실에 있는 책의 대부분을 이곳에 가져다 놨다고 했다. 아래를 잘 보고 발을 딛지 않으면 책에 걸려 넘어질 듯했다. 연로하신 교수님이 무언가를 찾는다며 책더미를 피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유난히 큰 컵에 담겼는데, 그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찬 커피가 아니라 따뜻한 차를 사 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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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잘 읽었습니다. 정말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책이던데요.”
“운이 좋았죠. 자료를 다 넘겨받았으니까요. 판결문도 6·25 때 멸실 당했다 하고, 수사기록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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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두 차례 ‘교수 k’로 명명해온 인물이 바로 그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 김정기. 한국언론학회 회장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의 전신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언론학계 원로다. 1940년생이니 올해 여든여섯이다. 김진원 선생은 2019년 말 이 오피스텔을 찾아와 김정기 교수에게 큰절부터 했다. 책에 대한 크나큰 감사를 표현한 행위였다. 김진원 선생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나온 뒤 북한으로 간 김옥주 의원의 아들이다.
2008년 9월에 출간된 그 책의 제목은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Ⅰ·Ⅱ’다. 각 권은 400여쪽으로 두 권을 합치면 800쪽이 넘는다. 딸린 자료집으로 150쪽짜리 ‘국회프락치사건 재판기록’도 있다. 이 책에 관한 이야기는 국회프락치 사건이 벌어진 1949년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삼등 서기관으로 국회연락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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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헨더슨은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국회의원들이 구속됐을 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위에서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판단해 그 관심을 실천했다. 그는 1949년 11월17일 열린 이 사건 첫 공판부터 1950년 2월4일 열린 마지막 14차 공판, 그리고 2월10~13일 열린 세 차례 결심공판에서 나온 판사와 검사, 변호사, 피고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담긴 보고서를 미 국무부에 보냈다. 공판 때마다 미 대사관의 한국인 직원 신정균과 김우식을 보내 공판을 참관하게 하고 영어로 기록한 것이었다. 그는 매회 공판이 끝날 때마다, 또는 2회를 하나로 묶어 공판 기록 전문과 함께 각 공판의 특징적인 면모와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논평’도 보냈다. 그의 나이 27살 때였다. 당시 언론은 첫 공판을 비중 있게 다뤘지만, 10회 넘게 이어지는 공판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보도하지는 않았다.
결심공판이 끝난 뒤엔 당시 미국 경제협조처(ECA) 소속으로 대사관에 법률자문을 해주던 에른스트 프렝켈(1898~1975)에게 의뢰해 받은 법률분석보고서도 함께 국무부에 보냈다. 이 보고서는 공판에서의 핵심 쟁점을 분석하고 재판이 공정했는지, 검사의 유죄 입증은 성공했는지를 판단하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헨더슨이 미국에 돌아가 터프트대 교수(플레처 법외교대학원)가 된 뒤 1972년 7~8월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공판의 판사·검사·피고인·관계자 등 20여명을 인터뷰해 육필 원고로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헨더슨 교수의 각종 기록을 중심에 놓고 그동안의 학계 연구성과를 더해 한국 현대사에 회오리친 국회 프락치 사건의 전모를 다룬 책이 ‘국회 프락치사건의 재발견 Ⅰ·Ⅱ’라 할 수 있다. 별도의 자료집으로 함께 출간된 ‘국회 프락치사건 재판기록’에선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 국무부에 보낸 공판기록과 법률분석보고서 전문을 영어로 수록하고 김 교수의 해제(해설)를 넣었다. 그는 이 해제에서 “헨더슨 공판 기록은 적어도 제1공화국 시절 대규모 공안 사건의 공판 기록으로는 유일하게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다. 형사 사건 재판의 경우 공판 진행의 요약만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관행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 문헌적 가치는 귀중하다”고 썼다. 한국전쟁 이전의 사건이 대개 그렇지만, 국회 프락치 사건 역시 전쟁 중 기록이 대부분 소실돼 헌병대 수사기록과 검사의 공소장, 판사의 판결문만 간접적인 형태(언론 보도)로 남은 형편이다.
“그런데 7년 전 김진원 선생이 이 오피스텔을 찾아와 큰절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책 나오고 10년이 지난 뒤에서야 우연히 책을 읽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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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낼 때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이 어딘가 살고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만나리라고는 상상 못 했어요. 김진원씨가 찾아와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했는데, 식당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등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책 쓴 보람을 느끼셨겠네요.”
“내 책이 후손들의 명예회복에 조그만 보탬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적잖은 기쁨이 솟아났어요.”

김진원 선생의 큰 절은 타계한 그레고리 헨더슨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김정기 교수에게도 “죽을 때까지 김 교수님과 헨더슨 교수님을 존경하겠다”고 말했다. 또 “헨더슨 교수님이 일평생 국회프락치 사건을 그렇게 연구하셨는데, 제가 언젠가 묘소를 꼭 가보겠다”고도 했다. 김진원 선생은 정말로 2024년 9월 보스턴에 있는 헨더슨의 묘소를 참배한다.
그렇다면 헨더슨이 갖고 있던 공판 기록과 연구자료는 어떻게 김정기 교수에게 넘어왔을까. 그것은 아주 기이한 인연이었다. 김 교수가 그레고리 헨더슨이라는 이름을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기고 글을 통해 접한 때가 1973년. 그를 직접 만난 것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86년 12월,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세미나장에서였다. 그리고 1988년 봄까지 짧은 기간 교류를 했다. 만난 횟수는 세 차례였다.
생전에는 서로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공판기록의 존재는 헨더슨이 1988년 12월 집 지붕에서 가지치기하다 떨어져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에야 제대로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헨더슨 타계 4년 만인 1992년 헨더슨 교수의 부인 마이어 여사로부터 남편의 연구한 기록물을 넘겨받고, 그리고 또 14년이 지난 2006년에 이를 풀어 읽어본 뒤였다. 이 자료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도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2008년에야 김정기 교수의 책을 통해 마침내 빛을 본 헨더슨의 기록은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팩트와 관점을 보여주었다. 피고인들과 증인들의 진술, 각종 인터뷰 자료는 사건의 빈 공백을 채웠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록 중 하나는 이재남의 진술이었다.
이재남은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제헌국회의원 노일환을 접촉한 남로당 공작원 이삼혁(하사복·김사복과 같은 인물)의 상관이었다. 그는 1950년 1월20일 열린 제12차 공판에 출석했다. 변호인단이 요구한 증인이 아니었다. 검찰 쪽 증인이었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해 앉은 채로 증언해 고문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판사는 그에게 물었다. 검사가 내세운 증거 1호, 즉 여간첩이 음부에 숨겼다는 암호문건이 사실이냐고.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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