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말고 이런 강릉도 있다…‘오감’ 깨우는 가을 감각 여행
하슬라강릉 이머시브 아트쇼에도 둥근 보름달이 떴다. 사진 김기쁨 여행작가
조금씩 공기가 서늘해지면서 감각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고, 혀에 닿는 온도가 또렷해졌으며, 해가 진 후 빛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니 이 계절에 떠나는 여행에서는 감각을 모조리 열어 한 도시를 천천히 더듬어볼 일이다. 둥근달이 차오르고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반가운 가을, 목적지는 강릉이다. 해변과 커피로만 기억되던 도시가 사뭇 다른 얼굴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미디어아트로 초충도가 살아움직인다. 무심히 지나칠 뻔한 것들을 만나는 사이, 무뎠던 감각이 깨어난다. 사진 김기쁨 여행작가
구석구석 눈이 머무는 집, 오죽헌
먼저 찾은 곳은 강릉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이 살던 집, 오죽헌이다. 건물을 에워싼 검은 대나무 때문에 오죽헌이라 불린 집에서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이 집에선 걸음이 느려진다. 그저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감각을 열고 구석구석 더듬게 된다.
초충도 속 식물들이 자라는 화단을 지나,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서 율곡을 낳았다고 전하는 몽룡실 앞에 이르면 오래된 나무들에 눈길이 머문다. 율곡과 신사임당의 이름을 딴 율곡송과 사임당 배롱나무가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나무는 육백 살 넘은 천연기념물 율곡매다. 몇해 전 고사 위기를 겪었으나, 다시 꽃을 피워낸 생명력이 마음을 끈다.
율곡기념관으로 걸음을 옮기면 이곳은 신사임당의 세계다. 풀벌레와 꽃을 섬세한 시선과 손길로 담아낸 초충도에서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오래 들여다보던 감각이 전해진다. 율곡기념관에서 나와 문 하나를 건너면 강릉화폐전시관이다. 5만원권의 신사임당과 5000원권의 율곡을 시작으로 화폐가 걸어온 길이 시대순으로 펼쳐져,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지폐 한 장이 문득 새롭게 보인다.
정문으로 돌아가는 길, 들를 곳이 남았다. 강릉시립박물관은 두 위인에 머물던 시선을 고장 전체로 넓혀준다. 구석기시대부터 관동팔경과 강릉단오제에 이르기까지, 영동 땅이 쌓아온 세월이 주제별로 이어진다. 인성교육관에서는 미디어아트로 초충도가 살아 움직이며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무심히 지나칠 뻔한 것들을 만나는 사이, 무뎠던 감각이 깨어난다.
선교장에서는 소리 감각을 깨운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 열화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가 열린다. 김기쁨 여행작가 제공
대청에 번지는 오르간 소리, 선교장 수요음악산책
오죽헌에서 감각을 깨웠다면 이제 귀를 활짝 열어보자.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후손 이내번이 터를 잡은 뒤 여러 세대에 걸쳐 증축한 아흔아홉 칸의 저택, 선교장에서다.
과거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던 시절, 이곳을 건너려면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배다리마을 또는 선교리로 불렸다. 마을의 큰 집이라는 뜻에서 선교장이라 불린 이 집은 여행자에게 늘 열려 있었다. 수많은 과객이 다녀가며 글과 그림을 남겼는데, 선교장 박물관에 걸린 작품들이 그것이다.
삼백 년 동안 역사를 쌓아온 집에는 여전히 후손들이 머무르며 여행자를 맞이한다. 고택 스테이와 카페, 문화 체험이 어우러진 가운데 일주일에 한 번 특별한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 열화당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가 울린다. 파이프오르간 연주다. 성당에 있을 법한 서양 건반 악기가 기와지붕 아래 자리를 잡았다. 연주가 시작되고, 두텁고 웅장한 음이 대청을 넘어 마당으로 번지면 낯섦은 사라지고 전율만 남는다.
사랑채인 열화당의 당호는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한 구절에서 따왔는데, 가까운 이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이라는 뜻이라고. 좋은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삶을 아끼는 마음이 스민 공간인 셈이다. 이곳에서 삼십 분 남짓 이어지는 연주 틈틈이 오르가니스트인 한지윤 문화예술국장이 선교장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전 선교장이 꿈꾼 풍경 역시 사람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었을 테다. 오르간의 웅장한 선율이 그 위에 더해지니, 오랜 세월이 묻은 대청이 오늘의 정취로 다시 채워진다.
초콜릿 브랜드 ‘알랭 뒤카스 쇼콜라 파리’ 국내 첫 매장이 강릉에 들어섰다. 사진 김기쁨 여행작가
혀끝으로 녹아든 파리, 알랭 뒤카스 쇼콜라 파리
이번엔 먹으며 감각을 깨워볼까. 강릉을 커피의 도시로 만든 주역 중 하나인 테라로사 본점으로 향한다. 테라로사는 2002년 문을 연 뒤 생두를 직접 골라 볶으며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일궈왔다. 원두의 산지와 개성을 중시하는 단단함, 그와 결이 맞는 새로운 이웃이 올여름 찾아왔다. 프랑스 미식계 거장 알랭 뒤카스의 초콜릿 브랜드 ‘알랭 뒤카스 쇼콜라 파리’가 국내 첫 매장을 연 것이다. 카카오의 산지와 풍미를 온전히 담아낸다는 철학은 생두부터 살피는 테라로사의 방식과 닮았다.
알랭 뒤카스 쇼콜라 파리 ‘강릉 에디션’ 초콜릿. 사진 김기쁨 여행작가
완제품을 수입하지 않고 강릉에서 직접 초콜릿을 빚는다는 점도 인상적인데, ‘강릉 에디션’은 오직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강릉의 바다에서 영감을 얻어 해마와 거북이, 게와 조개, 바닷가재와 물고기 모양으로 빚은 초콜릿은 저마다 다른 맛과 질감을 품었다. 하나씩 순서대로 먹으면 카카오의 풍미와 질감이 한 단계씩 깊어진다. 러스틱 밀크의 부드러움으로 시작해 고소한 아몬드, 붉은 과실, 섬세한 꽃향기를 거쳐 카카오 본연의 맛에 다다른다. 곁들이는 짝은 프랑스식 진한 핫초코인 쇼콜라 쇼. 선명한 산미와 묵직한 농도로 초콜릿의 여운을 끌어올린다. 쌉싸름하고 달콤한 시간이다.
코끝을 붙드는 차 한 잔, 초희 전통차 체험관
달콤함에 취한 혀에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 그럴 때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을 찾는다. 싱그러운 솔숲에서 청량한 소나무 향을 들이마시며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동생 허균은 우리말로 쓴 첫 소설 ‘홍길동전’을 남겼고, 누이 허난설헌은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를 짧게 살다 갔지만, 그가 지은 시는 훗날 중국과 일본에서도 격찬받았다. 공원 곳곳에 허난설헌 생가터와 기념관, 시비가 자리해 걷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문장의 결이 솔향과 함께 스민다.
공원 한쪽에는 초희 전통차 체험관이 있다. ‘초희’는 허난설헌의 본명. 시인의 이름을 딴 이 다실에서는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지역 다도회 회원들이 차를 우리며 차 시음회와 다도 체험을 운영한다. 마루에 앉아 찻상을 받으면 다관에서 김이 오르고, 마른 잎이 뜨거운 물에 깨어나 향을 풀어놓는다. 코끝을 붙드는 것은 그 첫 향이다. 예를 갖춰 차를 따르고 받는 몸짓을 서툴게 흉내 내는 사이, 곁들여 나온 다식의 단내가 살며시 포개진다. 솔숲과 데운 찻물이 함께 빚어내는 가을날 문향의 냄새. 바쁘던 하루에 나직한 쉼표를 찍어 주는 한 잔이다.
하슬라 강릉 이머시브 아트쇼에서는 다섯 개의 달이 뜬다. 넉넉한 안녕을 바라는 마음도 둥글게 차오른다. 사진 제공 김기쁨 여행 작가
눈앞에 차오르는 다섯 개의 달, 하슬라 강릉 이머시브 아트쇼
하루의 마지막 장면은 어둠이 내려야 비로소 보인다. 차를 우리던 공간 바로 옆 공원은 해가 진 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뀐다. 올봄 첫선을 보인 하슬라 강릉 이머시브 아트쇼가 초당동 솔숲에서 펼쳐진다. ‘하슬라’는 강릉의 옛 이름으로, 미디어아트 속 이야기의 씨앗은 경포에 전해오는 다섯 개의 달 전설에서 왔다.
옛사람들은 달 밝은 밤 경포에서 다섯 개의 달을 헤아렸다. 하늘에 뜬 달, 바다에 뜬 달, 호수에 비친 달, 술잔 안에 찰랑이는 달, 그리고 마주 앉은 이의 눈동자에 어린 달. 아트쇼는 다섯 개의 달이 모두 차오르는 순간 잠들어 있던 숲 하슬라가 깨어난다는 스토리로 진행된다.
무대는 솔숲 전체다. 곧게 뻗은 소나무 사이사이로 빛이 쏟아지고, 나무둥치와 바닥, 허공까지 온갖 색으로 물들며 숲이 하나의 거대한 화폭으로 변한다. 화려한 조명과 안개 등 특수효과가 어둠 속에 신비로운 장면을 잇달아 펼쳐내니, 관람객 또한 빛의 일부가 된다. 그 순간, 숲을 깨운 다섯 개의 달 곁에 여섯 번째 달이 떠오른다. 곁에 두고 아끼는 얼굴들과 그들을 향한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 넉넉한 안녕을 비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둥글게 차오른다. 빛이 잦아들고 숲이 다시 어둠에 잠긴 뒤에도, 한번 떠오른 달은 쉬이 저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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