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경계에서 자란다 [이길보라의 경계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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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오늘 아이는 기상 시간이 되기도 전에 일어났다. 아기가 일어나기 전에 원고 마감을 하겠다며 한두시간 일찍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온 엄마의 기척을 눈치챈 탓이다. 사실 아이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물통의 뚜껑을 열어달라며 나를 깨운 후 책을 읽겠다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런 아이를 겨우 다시 재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 잠든 탓에 수면 시간이 부족해 괴로운 파트너가 아이를 안고 작업실로 왔다. 잠깐 더 자겠으니 부탁한다는 그의 말에 뿌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다 만 원고를 두고 아이에게 아침을 먹였다. 나도 함께 밥을 챙겨 먹고는 세수하고 아이에게 옷을 입혀 보육원으로 향했다. 처음 등원했을 때는 절대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며 옷자락을 붙잡고 세상 떠나가라 울었는데 이제는 선생님을 보면 안아달라며 팔을 벌린다. 오늘 하루도 재밌게 잘 보내라며 인사하지만 아이는 보육원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운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두고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면 보육사는 말한다.
“잇테랏샤이!”( いってらっしゃい·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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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으면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처럼 “잇테키마스!”(行ってきます·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경쾌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얼마 전에는 선생님이 아이가 집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물었다.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아빠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저희는 서로 영어를 쓰고 아이 할머니는 한국수어로 말한다고 하자, 보육사는 아이에게 밥 먹자고 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움직일 기미를 보이질 않아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하여 아이에게 “캄 온”(Come on)이라고 말했다며 일본인 특유의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한국말은 아는 게 없어서 알고 있는 영어 단어를 최대한 동원했다고 말하는 중년 여성 보육사를 상상하니 어쩐지 귀엽고 재밌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의 언어·문화적 환경을 고려하고 고민하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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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이와 함께 욕조에서 간단한 물놀이를 했다. 아이는 바디 워시가 나오는 통에 손을 댔다. 무엇을 하나 가만히 지켜보니 거품이 나오는 구멍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양손에 비누 거품을 묻히듯 비비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시우야, 너 그거 어디서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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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활짝 웃으며 같은 행동을 한번 더 반복했다. 나는 손잡이를 눌러 아이의 손에 거품을 묻혀주었다.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손에 묻혔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마주친 채 손을 몸쪽으로 가져와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되게 움직였다. ‘목욕’이라는 수어였다. 그러자 아이는 손을 자기 몸으로 가져가더니 가슴에 거품을 묻혔다. 자신의 몸에 묻은 비눗방울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래, 그게 목욕이야. 몸에 거품을 묻히는 거. 목욕.”
나는 손으로는 수어를 하며 한국 음성언어로 말했다. 우리 아이가 벌써 스스로 목욕까지 할 수 있다니 감탄하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더니 이리 와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몸을 앞으로 숙이자 아이는 나의 어깨에 거품을 묻혔다.
“아니, 지금 엄마 목욕 시켜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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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커서 엄마 몸에 거품을 묻혀주다니. 예쁘고 사랑스럽고 감격스럽고 놀라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와의 일상은 놀람과 발견의 연속이다. 어제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세 걸음을 내딛기까지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보육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오늘도 한뼘씩 자랐을까. 나만의 시간을 절실하게 확보하고는 동시에 아이를 그리워하며 쓴다.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이번 칼럼으로 2024년 12월에 시작한 ‘경계에서 자란다’ 연재를 마친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임신하고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고 했을 때 흔쾌히 지면을 내어준 한겨레에 감사드린다. 이 글들은 연재명이기도 한 책 ‘경계에서 자란다’(문학동네)로 엮여 나올 예정이다. 농인의 자녀인 코다이자 예술가로서 농사회와 청사회, 시각언어와 음성언어, 장애와 비장애, 한국과 일본이라는 겹겹의 세계 속에서의 ‘경계’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도록 기다려준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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