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근형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평생 도전하게 되죠”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드라이버로 200m를 날리는 배우 박근형. 46년째 골프를 즐기는 그에게 필드는 또 하나의 무대이자 끝없는 도전의 공간이다.
“팔이 아니라 엉덩이를 쓰라고. 발바닥은 땅에 붙여야지.” 골프를 갓 시작한 후배에게 건넨 박근형의 한마디에 공이 뜨기 시작했다. 곱슬한 은색 머리가 골목 안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골목대장의 것처럼 넘실거렸다. 시니어 티 대신 레귤러 티에 섰고, B러프 위쪽 내리막 라이에 걸린 공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쳤다. 예상은 번번이 빗나갔다. 지난 10월 11일 뉴서울CC에서 열린 내일연극기금 마련 채리티 골프대회 ‘스윙 인 아트 포레스트’에서 골프를 사랑하는 진짜 배우 박근형을 만났다.
골프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1980년대 KBS 뒤 에 골프연습장이 있었어요. 이순재 형님, 신구 형님 등 배우들이 모여서 “우리 이제 술, 담배 끊고 운동하자” 하면서 시작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쭉 계속했고요. 피치 못할 때 소주 두 잔 정도 마시는 것 외에는 술을 끊었고, 담배도 완전히 끊었죠.
46년 가까이 골프를 이어오신 이유가 있나요. 저는 골프 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요. 골프를 시작하고 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운동 중에서 이것밖에 없구나 싶었어요. 무거운 것을 들거나 뛰지 않고도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운 동이죠.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니까 평생 자꾸 도전하게 되잖아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습 했어요.
겨울에도 두 시간씩 연습하면서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 였죠. 요즘에는 일주일에 네 번 정도 연습해요. 잘 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몸이 잘 돌아가도록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서예요. 필드에 매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주로 연습 장에서 휘둘러 보는 거죠.
레귤러 티에서 드라이버샷을 200m나 보내셨습니다. 골프의 묘미는 무엇인가요. 제가 150m를 보내더라도 동 반자들과 같은 티를 썼을 거예요. 어우러진다는 재미가 있는 건데, 좋은 지인들과 자연 속에서 햇볕을 받으며 걷 고 운동하는 거잖아요.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다른 티를 쓰고 싶지는 않아요. 조금 모자라도 같이 따라가는 재미가 있죠.
저는 터치 플레이나 멀리건을 안 씁니다. 내 샷을 기억하 고 다음에 와서 다시 해보니까 굳이 그 자리에서 다시 칠 필요가 없는 거죠. 골프는 우리 사람 사는 거나 마찬가지 예요. 자기가 어떻게 설계해서 어떻게 가느냐. 그 방향 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저 도전해서 가보는 겁 니다.
필드에서든 연습장에서든 그냥 공이 맞는 재미로 치는 거죠. 골프 선수가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골프를 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이순재 형님과 라운드할 때였어요. 모두들 룰에 대해 설왕설 래 말이 많아서 무조건 공이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치기 로 했죠. 초보 때는 공을 치고 난 다음에 들고 뛰기도 했 지만, 그다음부터는 무조건 노 터치였어요.
간혹 모래통 같은 데 공이 떨어지면 그 위에 올라가서 쳤다니까요. 공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요. 한번은 백일 섭 씨가 모래통에 올라가 공을 쳤는데 길바닥으로 떨어 졌어요. 거기서 다시 쳤더니 아이언 클럽 날이 완전히 망가진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방방 뛰더라고 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왜 그렇게 멀리 보내려고 욕 심을 내느냐. 요령 있게 톡 쳐서 잔디로 보내 놓고 그다음에 풀 위에서 치면 될 거 아니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레그 노먼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호주 콴타스항공이 국내에 취항하면서 관광청의 요청으로 그레그 노먼과 광고를 찍었어요. 국익을 위해 광고비 한 푼 받지 않고 봉사하는 모습이 놀라 웠죠. 촬영을 잠시 쉬는 동안에도 공을 한 바구니 가져와 계속 굴리는 연습을 하더라고요. ‘프로는 한시도 쉬지 않 고 연습해야 하는구나’ 생각했죠.
시간이 나서 레슨을 부탁했더니 한번 쳐보라는 거예요. 몇 개 치니까 좋다고,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총리도 와서 똑같은 코칭 을 받고 가더라고요. 총리 공관에서 촬영할 때였어요.(웃음)
60여 년간 배우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던 시절이 궁금합니다. 195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 자마자 충무로에 나와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어요. 이듬해 중앙대학교에 진학했고, 동인제 연극을 7년 정도 하다가 1963년 KBS 3기생으로 들어갔죠. 배가 고파서 들어갔는데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어요. 인정받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요. 1968년쯤 연기를 그만두고 고향 에 내려갔는데 이효영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무대에 섰 고, 이듬해 동아연극상 남자 연기상을 받았어요.
이후 TBC와 MBC를 거쳐 프리랜서 선언을 했어요. 당 시에는 방송사마다 전속 배우를 보호하다 보니 좋은 작 품을 많이 해도 상을 받기 어려웠죠. 그러다 SBS <형제 의 강>(1996)으로 35년 만에 처음 대상을 받았어요. 김 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 <모래성>, 김종학 감독의 <여 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많은 작품을 했고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새로운 배역에 도전했죠.
최근에는 다시 연극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2016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의 <아버지>를 했어 요. 윤소정 씨의 <어머니>와 함께 공연했는데, 국립극단 이 이 연극으로 최초의 만원 사례를 기록했죠. 2023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시작하면서 <베니스의 상인>, <더 드레서> 등 지금까지 쭉 해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연극계가 많이 달라졌어요. 실험극 위주의 젊은 연 극만 있고 정통 연극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구 선생과 <고도를 기다리며>를 시작한 겁니다. 다행히 관객들이 사 랑해 주시고 호응도 좋아서 다시 붐을 일으킨 거죠.
이번 채리티 골프대회는 내일연극기금 마련을 위해 열렸습니다. 어떤 취지인가요. 정통극을 하는 배우들을 기초 부터 가르쳐 놓으면 실험극뿐 아니라 어떤 작품도 소화 해 낼 수 있어요. 그래서 기초를 전달해 주자는 의미에서 지난해부터 시작한 게 내일연극기금입니다.
2025년 처음 시작했는데 인터넷 공모에 960여 명이 지원했어요. 서류심사로 70여 명을 골랐고 최종 36명이 워크숍에 참여했죠. 선발된 예비 배우들은 1월부터 3월 까지 교육받고, 4월에는 작품을 무대에 올립니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도 100만 원씩 줬어요.
2회째인 올해부터는 일반 연극단체 수준의 공연을 선보 이려고 합니다. 선후배 배우들도 보조 출연으로 참여하고요. 젊은 배우들의 수준과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배우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4년제 대학에서도 2년 동안 교양과목을 배우고 나머지 2년 동안 전공을 공부하는데, 공연 한 번 하고 졸업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나오는 거죠. 이 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터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연기 이론을 직접 가르쳐 줄 선생님들도 없어졌고요.
배우 예술이 곧 무대 예술인데 이제는 배우가 하나의 소재로 쓰이고 있는 거죠. 주체가 변했어요. 난 그걸 되찾아 주려고 하는 거예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여러 예술 요소가 하나로 완성되는 종합예술, 그것이 무대 예술이자 배우 예술인 겁니다.
오랜 연기 인생을 통해 깨달은 연기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나이 40이 넘어 김종학 감독과 작품을 함께하면서부터 사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작품 속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연구하고, 그 사람의 심리를 생각하게 된 거죠. ‘내가 만약 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연기에 눈을 뜬 거예요.
배우 하나가 나오려면 반세기가 걸린다고 그래요. 내 나이가 지금 80이 넘었는데 반세기가 지났으니까 이제 좀 하고 있는 거죠. 자기 생각과 상상력을 이제 표현해 내는 거예요.
앞으로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정통극에 대한 생각을 가진 배우들끼리 모여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어떤 역할이나 작품을 꼭 하고 싶다기보다 도전해 보 고 싶은 게 많아요. 어떤 작품이든 가져오면 제가 표현하 고 싶은 생각이 많죠.
동료와 연극을 하는 모든 분께 이제는 진정으로 우리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K-컬처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우리의 연극은 아직도 남의 나라 작품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60여 년간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한국 공연예술의 역사를 함께 써온 배우 박근형.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무대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2023년 신구와 함께 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깊은 울림을 전했던 그는 지난 10월 15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6회 아름다운예술인상에서 공연예술인상을 수상하며 또 하나의 뜻깊은 이정표를 세웠다.
“아이돌은 없지만 박근형 배우가 있다”라던 배우 손현주 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필드에서도 그렇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