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국회프락치 사건 조사개시를 도왔다? [금자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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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조사가 개시된 게 한참 지나서더라고요.”
“소위원회 때 한번 논의하고 3년을 그냥 흘려보냈으니까요?”
“뭐가 문제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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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대한 내부 의지가 미적지근했어요. 조사 부서 안에서도 말이 잘 안 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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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는 전직 조사관이다. 과거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진실화해위원회가 그의 직장이었다. 4년여 근무하는 동안 여러 사건을 조사했는데, 국회프락치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만남을 청한 터였다.
6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 진실화해위원회 인근의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1시간 먼저 갔다. 그도 20여분 이른 시간에 왔다. 1년여 전 다른 일로 전화통화를 두어번 한 적 있지만, 얼굴을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경찰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실제 덩치와 인상이 강력계 형사 분위기를 풍겼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살인이나 조폭 사건도 많이 다뤘다고 했다. 경찰은 국회프락치 사건의 수사 주체 가운데 하나였다. 70여년 만에 그 사건의 진실을 캐겠다고 나선 조사관도 경찰 출신이었다. 이야기는 국회프락치 사건을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에서 시작해 왜 제때 진행되지 못했는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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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사건이 저에게 배당된 건 아니었죠. 다른 정부 부처에서 온 파견직 공무원이 그걸 들고 힘겨워하길래 제가 하겠다고 들고 왔어요.”
“조사관님도 파견직 아니었나요?”
“아, 2021년 진실화해위 입사할 때는 경찰 그만둔 뒤였어요. 파견직이 아니라 별정직이었죠. 2000년대 초반 인천경찰청에서 근무하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파견직으로 일한 적은 있어요. 이미 한번 국가 조사기구 일을 경험한 셈이죠.”
“국회프락치 사건은 원래 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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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진화위에서 처음으로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대적 상황, 역사적 의미, 당시 실정법을 공부하면서 파악을 해나갔죠.”
“회의 속기록을 보니, 소위원장은 어떻게든 조사개시를 하고 싶어하는데 위원 중 한 분이 엄청 반대했더라고요.”
“아, 그거 보셨어요? 2소위 위원 구성이 여야 2대2인데, 합의가 안 되면 소위에 재상정하거나 전원위로 가야 해요. 그런데 재상정도 안 하고 질질 끈 거죠?”
“위원 C의 반대 때문이었나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조사부서 내에서도 확신이 없었어요. 문제의 국회의원들이 북으로 가서 이 사건은 각하해야 한다고 저한테 말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요?”
“아니 국회의원을 고문한 사건인데, 미국에 가 있든 달나라에 가 있든 무슨 상관이냐고 따졌죠. 논쟁이 좀 있었어요.”
소위원회 속기록을 읽다가 조사관 P에게 연락한 거였다. 2021년 9월30일 국회프락치 사건 조사개시 여부를 논의한 진실화해위원회 제2소위원회 속기록에서 위원 C는 이 사건이 얼마나 민감한지, 왜 개시 결정을 보류해야 하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조사관 P도 그날 위원들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P는 소위원회에서 ‘월북’을 명분으로 강력한 반대가 나오리라 예상했다고 한다. 국회의원 12명이 1950년 9월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 월북, 즉 북한으로 넘어간 게 사실이라면 이 사건에서 가장 예민한 아킬레스건이 될 거였다. 게다가 위원 C는 “자진월북”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조사 부서 내에서도 “국회의원들이 북으로 갔으니 각하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앞길이 험난해 보였다.
그런데 “월북했다”는 판단의 출처가 모호했다. 국가 기관의 공식 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없었다. 조사관 P는 한참 뒤에 조사를 끝낸 뒤 “월북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검토한 여러 기록은 오락가락, 뒤죽박죽이었다. 국회 사무처가 작성한 작성일 불명의 국회의원 카드나 1977년 의원총람에는 12명 의원 모두 ‘납북’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다가 1983년의 의원총람에서는 딱 절반인 6명에 대한 기록이 ‘월북’으로 바뀐다. 그보다 앞서 1968년 공산권문제 연구소에서 만든 ‘북한 총람’에는 9명이 월북했다고 나온다. 그 어디에도 납북과 월북의 판단 근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었다.
2010~2017년 사이엔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국무총리 소속 6·25 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였다.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 5명이 이곳에 납북 여부에 대한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노일환·신성균·강욱중·김병회·황윤호 의원의 자녀들이었다. 조사 결과 ‘납북자’ 결정을 받은 이는 신성균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판단 불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유족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신뢰할 만한 판단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월북’의 반대편엔 ‘고문’이 있었다. P 조사관은 “구속된 국회의원뿐 아니라 남쪽에 남은 가족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만으로도 충분히 조사개시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월북’과 ‘고문’의 대립 구도였다. 끝내 조사는 개시됐다.
“그래서 언제부터 조사한 거죠?”
“2025년 1월21일 조사개시가 결정됐어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조사했죠.”
“또 C 위원이 반대했을 텐데요.”
“그분은 소위원회 회의 날 안 왔어요.”
“네?”
“그때가 12·3 비상계엄 직후였잖아요. 그분이 변호사로서 윤석열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들어가 활동했어요. 무지 바빴나 봐요. 하하하.”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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